▲ 1935년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에서 열린 여자빙상경기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 밝은 얼굴로 연습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압록강에서 가까운 평안북도 강계 출신의 김영선이 1934년 전조선빙상경기선수권대회 여자부 최강자로 올라 선 것은 북한의 한필화가 1964년 인스부르크(오스트리아)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3000m에서 옛 소련의 발렌티나 스테니나와 공동 은메달을 차지한 것과 연계성이 있다. 한필화는 남녀 통틀어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메달을 차지했다. 한필화는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 하구 진남포 출신이다. 1935년 1월 서울 한강에서 조선체육회가 치를 예정이던 제 11회 전조선빙상경기선수권대회는 온화한 날씨 때문에 열리지 못하는 등 그때도 ‘겨울철 온난화’현상이 종종 나타났다. <2편에서 계속>  
 
1936년 2월 6일부터 16일까지 독일 가르미시-파르텐키르헨에서 열린 제4회 동계 올림픽스피드스케이팅에 이성덕과 김정연, 장우식 등 우리 선수 3명이 일본 대표 선수로 참가했다. 일본은 1928년 제2회 생모리츠(스위스) 대회 스키 종목에 6명의 선수를 파견해 첫 출전한 이후 이 대회에는 스키와 아이스하키, 피겨스케이팅 등에 31명(여자 1명)의 선수단을 내보냈다. 스피드스케이팅에는 7명의 선수 가운데 3명이 조선인 선수였다. 당시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우리 선수들이 일본 선수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스피드스케이팅은 기록 경기여서 뛰어난 기록을 자랑하는 우리 선수들을, 농구나 축구처럼 일본체육협회가 무시할 수 없었다.

36명이 출전한 500m에서 이성덕은 45초0으로 12위를 했고, 37명이 참가한 1500m에선 김정연이 2분25초0의 일본 신기록을 세우며 15위로 골인했다. 이성덕은 이 종목에서 2분28초9로 23위를 했다. 39명이 나온 5000m에서 김정연은 8분55초9로 21위, 이성덕은 9분8초0으로 27위 그리고 장우식은 9분8초7로 28위를 했다. '빙판 위의 마라톤’으로 불리는 1만m에는 조선인 선수 3명만 출전했다. 30명의 선수 가운데 김정연은 18분2초8의 올림픽 신기록이자 일본 신기록을 마크하면서 13위로 들어왔다. 이성덕과 장우식은 각각 25위와 26위였다. 한강이 제대로 얼지 않아 대회를 열지 못하는 등 열악한 경기장 시설과 국제 대회 출전 경험 부족 등 악조건 속에서도 중위권에 들었다는 것은 한국 동계 올림픽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일제 치하에서 중단됐던 전조선종합경기대회도 부활했다. 1945년 10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는 자유 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가 막을 올렸다. 이 대회가 제26회 전국체육대회로 꼽히게 된다. 이 대회 개회식에서 태극기를 든 기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이었다. 이 대회는 육상과 축구, 농구, 야구, 배구, 정구. 럭비, 사이클, 탁구, 승마 등  10개 종목에 걸쳐 치러졌다. 1946년 1월 29일에는 한강에서 이 대회의 동계 대회가 열렸다.
 
조선체육회는 1946년 10월 16일부터 닷새 동안 서울운동장에서 ‘조선올림픽대회’를 열었다. 아직 전국체육대회라는 명칭이 정착되지 않았던 때인데다 2년 뒤 런던 올림픽 출전에 대한 열망이 조선올림픽대회라는 대회 명칭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회가 제27회 전국체육대회다. 이 대회의 동계 대회는 다음 해인 1947년 1월 21일 열렸는데 스피드스케이팅은 한강에서 열렸다. 

1947년 10월 13일부터 1주일 동안 조선올림픽대회(제28회 전국체육대회)가 3천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의 동계 대회는 1948년 1월 29일부터 사흘 동안 열렸는데 스피드스케이팅은 한강에서 치러졌다. 그 무렵 한강은 우리나라 겨울철 스포츠의 메카였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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