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에서도 '인조 잔디' 운동장을 찾을 수 있다. K리그의 피치 상태는 어떠한가. 맨땅 같은 경기장에서 이근호가 뛰고 주세종이 뛴다한들 특별한 경기력이 나올까. ⓒ한국프로축구연맹
[스포티비뉴스=창사(중국), 유현태 기자]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모래 바닥에 명화를 그릴 순 없다. K리그가 투박하다는 인상을 만드는 데는 선수들이 '그림을 그리는' 피치의 잔디 상태도 한 몫했다.

강원 FC는 11일 평창 알펜시아스타디움에서 FC 서울과 2017년 시즌 KEB하나은행 K리그 클래식 2라운드를 치렀다. 네 시즌 만의 클래식 복귀전을 치렀으나 선수들의 경기력 때문이 아니라 잔디 때문에 눈총을 받았다. 잔디가 지나치게 누워서 공이 맨땅처럼 빠르게 굴렀고 악취가 났다. 3라운드 포항 스틸러스전에서야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했지만 잔디 상태가 좋다고 보긴 어렵다. 전북 현대와 전남 드래곤즈도 전주월드컵경기장이 아닌 전주종합경기장에서 치른 개막전에서 잔디 때문에 고생했다.

K리그의 잔디 상태는 중국도 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2018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A조 6차전을 치르기 위해 중국 창사로 떠난 한국 축구 대표 팀은 20일과 21일 중국 창사 후난성 인민 경기장에서 훈련을 진행한다. 경기장 주변에 건물들이 서 있고 한쪽에만 관중석이 있는 '시민 운동장' 수준이다. 그러나 잔디 상태엔 문제가 없다. 이재철 대한축구협회 홍보과장은 “잔디 상태가 아주 좋다고 한다. 훈련장이 도심에 있는 점도 좋다”며 훈련장에 대한 만족감을 나타냈다. 후난성 인민경기장의 잔디는 카펫처럼 푹신해 보였다.

잔디는 경기력과 직결된다. 잔디가 고르지 않으면 공이 깔리지 않고 튄다. 그렇지 않아도 빠른 K리그의 압박 아래 볼 컨트롤이 흔들리면 일단 걷어 내고 봐야 한다. 예쁜 축구를 하자고 위기를 감수할 수는 없다. 세밀한 패스 플레이보단 거친 축구를 할 수밖에 없다. 

▲ 훈련장까지 빼앗겼지만 슈틸리케호가 새로 얻은 훈련장 잔디도 K리그보다 상태가 좋았다.

SPOTV 김태륭 해설 위원은 "잔디가 좋지 않으면 공을 다루기 어렵다. 잔디 자체도 중요하고 잔디 밑의 땅도 중요하다. 규칙적이고 적당히 부드러워야 한다. 평창은 땅도 딱딱하고 잔디 상태가 좋지 않았다"며 잔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어 "잔디가 뒤집어져 날아다니는 경우가 있지 않나. 겉보기엔 좋을지 몰라도 잔디가 뿌리를 내리지 않아 균형 잡기가 어렵다. 잔디 질이 높아지면 당연히 경기력도 좋아진다"고 덧붙였다.

K리그는 투박하다. 그러나 선수들이 기술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김 해설 위원은 지난 시즌 전북 현대의 예를 들었다. 그는 "전북이 전주에선 투박한 경기를 했지만, 클럽 월드컵에 가서는 패스 위주의 경기를 펼쳤다"며 잔디가 선수들의 플레이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1월 우즈베키스탄과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A조 5차전을 치른 뒤 구자철이 "홈에서 경기를 하면서 제대로 된 볼 터치를 한 적이 별로 없다. 경기장 상태는 경기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잔디 상태가 너무 안 좋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분데스리가에서도 뛰어난 기술을 자랑하는 구자철도 한국의 경기장에선 볼 터치조차 힘들다.


프로 스포츠는 팬들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K리그가 투박하고 거칠다는 편견은 결코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경기장이 그 중요한 원인이란 것이 문제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을 비롯한 각 구단은 '소비자'인 팬들에게 재밌고 흥미로운 경기를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상품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채 관심을 바라는 것은 '직무 유기'다.

한국의 겨울은 길다. 더구나 최근 몇 년 여름 날씨가 유난히 더워 잔디 관리가 어려웠다. 여기에 대다수 구단이 각 지방자치단체 산하 시설관리공단과 협의해 경기장을 관리한다. 구단들이 잔디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희망은 있다. 개정된 스포츠산업진흥법이 2016년 8월 4일부터 시행돼 낙후된 경기장을 구단이 직접 개, 보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물론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제도적으론 길이 열렸지만 구단들이 직접 나서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스포츠산업진흥법의 하위 법령도 개선돼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김 해설 위원은 "유럽과 한국의 잔디 차이는 당연하다. 유럽에선 훈련장 잔디까지도 철저히 관리한다. 훈련을 마치면 열선으로 경기장의 온도를 높이고, 다친 잔디들을 매만지면서 잔디를 관리한다"고 설명했다. 현실적인 문제 속에서도 구단들은 잔디 관리에 힘을 쏟아야 한다.

선수들의 기량을 1,2년 만에 높이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잔디는 선수들의 전체적 기량 수준을 높이는 것에 비하면 단기적으로 이룰 수 있다. K리그 선수들이 최소한 갖고 있는 경기력을 맘껏 펼칠 수 있도록 최고의 피치를 준비해 줘야 하지 않을까.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명필도 모래 바닥에 멋진 글씨를 쓰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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