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8년 제5회 전조선아마추어권투(복싱)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선수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1937년 제9회 메이지신궁대회 복싱 종목에서는 플라이급의 박춘서, 밴텀급의 김명석, 라이트급의 최용진, 웰터급의 이규환, 미들급의 김승환이 우승해 조선 복싱의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일제 강점기에 복싱 마라톤 축구 등 스포츠는 항일운동의 하나였다. 복싱과 관련한 아래 일화에서 일제 강점기 조선인 복서들의 항일 독립 의지를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 복싱 선수들 사이에서는 ‘일본 선수들에게는 판정으로 이기지 못한다. 이판사판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고 한다. 판정이 아니라 누가 보기에도 승패가 뚜렷한 KO승이 아니면 일본 선수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조선인 선수들은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강한 펀치를 키웠다. <2편에서 계속>

 
그 무렵 일본인 복서 타도에 투지를 불태운 조선인 복서의 면모를 나타낸 대표적인 경기가 있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열리기 몇 해 전 와세다대학교 복싱부가 조선에 원정을 왔다. 이때 와세다대학교 선수 6명이 모두 KO로 졌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어느 경기에서 와세다대학교 선수가 로프에 몰려 샌드백 같은 상태가 됐다.
 
그러나 조선인 심판은 그 상황을 로프 다운으로 보지 않고 경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이런 경우라면 KO로 경기를 끝내야 했다. 조선인 선수는 상대방이 그로기 상태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두들겨 팼다.
 
뒤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총독부가 이 경기를 문제 삼았다. 당시 총독부는 스포츠를 문화 정치의 하나로 장려하고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조선에서 열리는 조선인 선수와 일본인 선수의 복싱 경기를 한때 중지시켰다.
 
1930년대에 열린 국제 대회에서 조선인 선수들은 빛나는 성적을 거뒀다. 1934년 마닐라(필리핀)에서 열린 제10회 극동아시아경기대회(오늘날 아시아경기대회의 모태) 복싱 밴텀급에서 김창엽이 우승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과 남승용이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해 한반도 전체가 기쁨의 도가니가 된 가운데 1936년 8월 5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제17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복싱과 탁구, 수영이 새로운 종목으로 추가됐다. 1945년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며 국제 대회 효자 종목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복싱에 대한 당시 체육계 인사들의 안목이 놀랍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체육계도 활기를 찾으면서 종목별 경기 단체 창립이 줄을 이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27일 조선송구[핸드볼]협회(회장 이선근)가 창립된 것을 시작으로 조선체조협회(9월 1일 회장 서상천), 조선육상경기연맹(9월 24일 회장 김승식), 조선탁구협회(9월 28일 회장 조동식), 조선연식정구협회(10월 1일 회장 황명원)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11월 10일 조선아마추어권투연맹(회장 안동원)이 창설됐다.
 
이후 조선빙상경기연맹(11월 24일 회장 이일), 대한테니스협회(11월 26일 회장 나추진), 조선유도연맹(11월 28일 회장 이범석), 조선자전거경기연맹(11월 30일 회장 민원식)이 창립되고 조선축구협회(12월 3일 회장 하경덕)와 조선농구협회(12월 19일 회장 이성구)는 재건됐으니 복싱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 단장을 한 셈이다. 당시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거의 모든 단체는 ‘조선’을 앞에 붙이고 있었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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