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아(왼쪽)와 아사다 마오 ⓒ GettyImages

[스포티비뉴스=조영준 기자] 스포츠에서는 어느 종목을 막론하고 라이벌이 존재한다. 상당수 선수는 경쟁자가 있으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 라이벌은 애증의 대상이다. 이들은 수많은 명승부를 펼치며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김연아(27)와 아사다 마오(27, 일본)가 펼쳐 온 인생 극장은 극적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들의 라이벌 구도는 시니어 무대 초기까지만 이어졌다. 이후에는 아사다가 김연아에게 도전하는 처지였다.

아사다는 일본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을 통틀어 가장 사랑받는 선수였다. 일본 국민의 관심과 애정만큼 엄청난 기대감도 받았다. 그런 아사다가 마침내 빙판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이후 그는 자신의 거취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선수 생활 유지를 선택했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대 후반이 된 그는 어린 후배들과 경쟁에서 밀렸다.

아사다는 10일 자신의 블로그에 "일본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를 마친 뒤 나를 버티게 해준 목표와 기대가 사라졌다. 피겨스케이팅 인생에 후회가 없다"며 은퇴 의사를 밝혔다.

▲ 201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김연아(가운데)와 3위 아사다 마오(오른쪽) 왼쪽은 은메달 카롤리나 코스트너 ⓒ GettyImages

같은 해, 같은 달 동해를 사이에 두고 태어난 두 소녀의 운명

김연아는 1990년 9월 5일 경기도 부천시에서 태어났다. 그로부터 20일 뒤 아사다는 일본 나고야시에서 출생했다. 언니를 따라 피겨스케이팅을 한 점도 공통점이다.

10대 초반 트리플 악셀에 성공해 일본 열도를 뒤흔든 아사다는 이토 미도리(48, 1992년 알베르빌 올림픽 은메달)와 아라카와 시즈카(36,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금메달)의 뒤를 이을 인재로 평가 받았다.

기대대로 아사다는 주니어 무대를 휩쓸었다. 2004~2005 시즌 그는 두 번의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주니어 그랑프리 2개 대회와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그리고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를 휩쓸었다. 자신이 독보적인 줄 알았던 아사다는 피겨스케이팅 변방인 한국에서 온 동갑내기 선수에게 위협을 받았다.

김연아는 2005년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아사다에 이어 은메달을 땄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몇몇 피겨스케이팅 관계자들은 서로 "우리 나라에는 정말 스케이트를 잘 타고 점프도 잘 뛰는 천재가 있다"며 얘기를 나눴다. 그들은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특별한 재능을 가진 천재들을 발견했다.

김연아와 아사다의 질긴 인생 역정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005~2006 시즌으로 들어오면서 상황은 역전이 된다. 주니어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한 김연아는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다. 

김연아는 아사다를 뛰어넘었지만 당시 심각한 상황에 있었다. 스케이트 부츠 문제와 부상으로 은퇴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스케이트 끈을 단단히 맨 그는 첫 시니어 시즌인 2006~2007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우승했다. 이듬해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와 2008년 대회에서는 모두 3위에 만족해야 했다. 아사다는 200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오른다. 그러나 다음 시즌인 2008~2009 시즌부터 아사다에게 김연아는 커다란 벽이 됐다.

부상을 털어 낸 김연아는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출전한 8개 국제 대회에서 7번 우승하고 한 번 준우승했다.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가 처음 정상에 오를 때 아사다는 4위에 그쳤다. 김연아와 아사다의 목표였던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이들의 명암은 엇갈린다.

김연아는 당시 여자 싱글 역대 최고 점수인 228.56점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연아의 위세에 흔들린 아사다는 프리스케이팅에서 실수하며 205.5점으로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두 선수의 점수 차는 무려 23.06점이었다. 라이벌로 부르기에 더는 의미가 없는 점수였다.

▲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리스트가 된 김연아(가운데)와 은메달리스트 아사다 마오(왼쪽) 동메달리스트 조애니 로셰트 ⓒ GettyImages

빙판을 떠난 그들, 피겨스케이팅 한 세대의 마지막 인사

김연아는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다음 시즌 휴식했다. 선수 생활 유지와 은퇴에서 고민하던 그는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도전 의사를 밝혔다. 김연아가 떠난 뒤 아사다의 시대가 열릴 듯 보였다. 그러나 아사다는 새로운 경쟁자들에게 밀리며 기복이 심한 성적표를 받았다. 2011년과 2012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아사다는 모두 6위에 그쳤다.

그러나 아사다는 2012년 부활했고 이해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우승했다. 이듬해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김연아를 만났다. 레미제라블이라는 걸작 프로그램을 들고 나온 김연아는 아사다를 여유 있게 제치며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이 대회에서 아사다는 3위에 올랐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마지막 승부는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벌어졌다. 당시 김연아의 최고 적수는 아사다가 아니라 러시아 선수들과 자기 자신이라는 시선이 있었다. 쇼트프로그램에서 무너진 아사다는 6위에 그쳤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 왔던 올림픽 금메달은 끝내 아사다를 외면했다. 프리스케이팅을 마친 아사다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김연아는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에서 완벽한 경기를 했다. 그러나 예상하지도 못한 시니어 국제 대회 우승 경험이 없는 아델리나 소트니코바(21, 러시아)가 엄청난 점수를 받으며 김연아를 앞질렀다. 김연아는 판정 논란 속에 올림픽 2연속 우승을 놓쳤지만 "큰 후회는 없다"며 담담하게 빙판을 떠났다.

김연아는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이 끝난 뒤 그해 5월 열린 아이스쇼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아사다는 2014~2015 시즌을 쉰 뒤 다시 빙판에 돌아왔다. 자국에서 열린 NHK트로피에서 우승했지만 이듬해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7위에 그쳤다.

▲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프리스케이팅이 끝난 뒤 눈물을 쏟는 아사다 마오 ⓒ GettyImages

아사다가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할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스케이팅이다. 평창 올림픽까지 계속하겠다"며 선수 생활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아사다의 의지대로 몸은 따르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12월 열린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12위에 그치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세계선수권대회 출전권을 놓친 그는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출전까지 불투명해졌다.

이달 초 핀란드 헬싱키에서 막을 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일본 선수들은 2위 안에 진입하지 못했다. 일본 여자 피겨스케이팅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2017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피겨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서 출전권을 2장밖에 얻지 못했다. 1, 2위 선수 나라는 3장의 올림픽 출전권을 얻는다. 3위부터 10위까지는 2장을 부여 받는다. 그 이하 순위면 1장으로 줄어든다.

미하라 마이(18)가 5위에 오르며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히구치 와카바(17)는 11위, 혼고 리카(21)는 16위에 그쳤다. 

쟁쟁한 후배들과 경쟁에서 아사다가 올림픽 출전권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 몰린 아사다는 결국 스케이트 끈을 풀었다.

주니어와 시니어 대회를 통틀어 김연아와 아사다의 통산 상대 전적은 김연아가 9승 6패로 우세했다. 아사다는 김연아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지 못하며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회, 그랑프리 파이널 4회, 4대륙선수권대회 3회 우승에 성공하며 나름대로 준수한 성과를 기록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미래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기대한 압박감을 이기지 못했다. 김연아라는 큰 벽을 넘지 못하며 '만년 2인자'로 남은 그는 비운의 스케이터로 여겨질 수 있다.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무려 20년 넘게 선수 생활을 하며 꾸준하게 상위권에 머문 점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주니어 시절, 풋풋했던 이들은 친한 사이였다. 이후 엄청난 라이벌 관계가 되자 이들은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다. 빙판을 떠난 김연아와 아사다가 서로 경쟁했던 추억들을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언제쯤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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