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6년 몬트리올 대회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한국의 올림픽 첫 금메달을 차지한 양정모(가운데)가 오이도프(왼쪽), 데이비스와 손을 맞잡고 기쁨을 나누고 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2020년 도쿄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일시적으로 탈락하는 아찔한 경험을 한 레슬링은 ‘재미없다’는 여론에 맞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경기 방식이다. 그런데 경기 방식이 지나치게 자주 바뀌어 레슬링 담당 기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으면 경기 방식을 숙지하지 못해 엉뚱한 기사를 쓰기도 한다. 양정모의 올림픽 금메달(1976년 몬트리올)은 당시 적용되고 있던 벌점제가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2편에서 계속>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자유형 페더급에 출전한 양정모의 최대 라이벌은 몽골의 제베그 오이도프였다.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오이도프를 꺾고 우승했으나 1975년 9월 민스크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오이도프에게 져 동메달에 그쳤다. 두 선수로서는 승패를 가려야 할 대회가 몬트리올 올림픽이었다.

양정모와 오이도프 그리고 미국의 진 데이비스가 맞붙은 결승 리그에서 양정모는 데이비스를 폴로 이겨 무벌점, 오이도프는 데이비스에게 판정으로 져 3벌점이었다. 양정모는 폴 또는 큰 점수 차(테크니컬 폴)로 지지 않으면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서 오이도프와 맞섰다.

양정모는 먼저 1점을 뽑았지만 이후 내리 5점을 내줬다. 점수 차가 더 벌어지면 테크니컬 폴패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양정모는 2라운드 들어 힘을 내기 시작했다. 1분 만에 5-5 동점을 만든 양정모는 이후 동점과 역전을 주고받는 접전을 벌였고 결국 오이도프가 10-8로 이겼다. 그러나 승자인 오이도프는 고개를 떨어뜨렸고 양정모는 환호했다. 양정모는 벌점 3점, 오이도프는 적은 점수 차 승리에 따르는 벌점 1점이 추가돼 벌점 4점이 됐다.

양정모는 4년 전 국내 선발전을 거쳐 출전권을 땄으나 소수 정예 방침에 밀려 1972년 뮌헨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아픔을 딛고 올림픽 챔피언 자리에 섰다.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도 일장기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아픈 과거를 시원하게 날려 버리는 쾌거였다. 몬트리올 대회에서는 자유형 플라이급의 전해섭이 3위를 했는데 레슬링에서 나온 첫 올림픽 동메달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가 금메달, 전해섭이 동메달을 차지하면서 일약 효자 종목으로 떠오른 레슬링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건너뛰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쾌거를 이룬다. 이 대회에서 레슬링은 유도(금 2 은 2 동 1)에 못지않게 한국 선수단의 메달 전략에 힘을 보탰다.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에 14명의 선수가 출전해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를 획득했다.

그레코로만형 62kg급 김원기는 조 예선에서 멕시코의 로베르토 아세베스, 엘살바도르의 구스타보 마주르, 그리스의 스틸리아노스 미기아키스를 잇따라 테크니컬 폴로 누르고 4차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뒤 사실상의 조 예선 결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오사나이 세이치와 경기에서 5-4로 이겨 메달권에 접근했다. 조 예선 6차전에서 스위스의 휴고 디치를 누르고 결승에 오른 김원기는 스웨덴의 켄트올레 요한손과 접전 끝에 3-3으로 비겼으나 큰 점수(3점)를 얻어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자유형 68kg급 유인탁은 조 예선 5번의 경기에서 3차례나 테크니컬 폴승을 거두는 등 가볍게 결승에 올라 미국의 앤드류 레인과 맞섰다. 유인탁은 어깨메어치기로 3점을 선취했으나 레인의 끈질긴 반격에 3-4로 역전당했고 다시 5-4로 뒤집었으나 경기 종료 37초를 남기고 5-5 동점을 허용했다. 유인탁은 김원기와 마찬가지로 경기 초반 얻은 큰 점수(3점)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자유형 52kg급의 김종규는 은메달을 추가했고 자유형 48kg급 손갑도와 57kg급 김의곤 그리고 62kg급 이정근, 그레코로만형 52kg급 방대두는 동메달을 보탰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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