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의 전문 마무리 투수, 데니스 에커슬리 ⓒ Gettyimages


[스포티비뉴스=박민규 칼럼니스트]지금의 불펜 체계가 확실하게 정립되기 전인 1988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감독이었던 토니 라루사는 아주 큰 결심을 하게 된다. 마무리 투수를 9회, 그것도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만 등판시키도록 한 것. 이는 야구 역사상 단 한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라루사 감독이 생각한 적임자는 한때 보스턴에서 한 시즌 동안 20승을 거두기도 했던 데니스 에커슬리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해 60경기에 등판해 53경기를 마무리한 에커슬리는 45세이브 평균자책점 2.35라는 반전의 성적을 거뒀고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며 최초의 ‘전문 마무리 투수’로서 그 활약을 단숨에 인정받았다. 현대 야구의 불펜 체계가 정립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이후 선발투수와 마무리 투수 사이의 공백을 막기 위해 더 많은 불펜 투수를 기용하기 시작했다. 선발투수가 마운드에서 내려간 후 등판한 불펜 투수가 나머지 이닝을 모두 막은 과거와는 달리 더 적은 이닝만을 던지게 됐다. 불펜의 분업화가 이뤄진 것이다. 때문에 언뜻 선발투수보다 더 적은 이닝을 던지는 불펜 투수가 선수 생활을 더 오래 유지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마무리 투수를 포함한 불펜 투수는 ‘롱런’하기 쉽지 않은 포지션 가운데 하나다. 마무리 투수로서 메이저리그에서 15년 이상 활약한 트레버 호프만, 마리아노 리베라는 매우 특별한 경우다. 대부분의 불펜 투수 가운데 호프만, 리베라와 같이 오랜 기간 꾸준한 활약을 펼친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불펜 투수들은 그 특성상 부상 가능성이 높고 기량 변화가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체 불펜 투수들 가운데 3년 이상 꾸준한 활약을 펼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렇다면 불펜 투수가 롱런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야구의 불펜 분업화가 확실하게 잡히기 전, 불펜 투수 역시 선발투수 못지 않게 많은 이닝을 던졌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불펜으로만 등판해 규정 이닝을 채운 투수는 모두 6명으로 그 가운데 1974년 다저스의 마무리 투수였던 마이크 마셜은 무려 106경기에 등판, 208.1이닝을 던져 사이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것은 1971년부터 1975년까지 마셜이 불펜 투수로서 연평균 77경기, 145이닝을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마셜도 혹사에 따른 후유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불펜 투수로서 100이닝 이상 투구한 사례는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 2012년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기도 했던 스캇 프록터는 순수하게 불펜으로만 100이닝 이상을 던진 메이저리그 마지막 투수다. 2006년 프록터는 당시 양키스 불펜에서 ‘수호신’ 리베라와 함께 가장 믿을 만한 불펜 투수였다. 때문에 프록터는 조 토레 감독의 지시에 따라 경기에 자주 등판할 수 밖에 없었고 그가 기록한 이닝은 102.1이닝에 달했다. 이듬해에도 86.1이닝을 던진  프록터는 2009년 토미 존 수술을 받았고 복귀 후 46이닝만을 던지고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마감했다.

한편 현재 메이저리그에는 ‘멀티 이닝’을 기록하는 불펜 투수들이 늘어나고 있다. 클리블랜드의 앤드류 밀러와 휴스턴의 크리스 데븐스키가 바로 그 대표 주자들이다. 지난해 멀티 이닝을 각각 11번, 27번 치른 밀러(74.1이닝)와 데븐스키(108.1이닝)는 올 시즌에도 8번 그리고 9번을 기록하고 있다. 신시내티의 라이셀 이글레시아스, 세인트루이스의 오승환 역시 멀티 이닝을 기록하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불펜 투수가 이들과 같이 멀티 이닝을 던지면서 좋은 투구를 펼치는 것은 아니다.

미국스포츠의학연구소(ASMI)에 따르면 근육이 지친 상태에서 연투할 경우 어깨 또는 팔꿈치 수술을 할 확률이 약 36배 높아진다고 한다. 더불어 ASMI는 투수들의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롱 토스와 불펜 투구를 할 때 전력 투구를 지양하라고 밝혔다. 하지만 불펜 투수들은 경기마다 등판할 준비를 해야 하며 실제 경기에서보다 몸을 풀 때 더 많은 공을 던지기도 한다. 이는 불펜 투수들의 팔에 상당한 무리를 준다. FOX스포츠의 C.J 니코스키는 투수의 부상을 줄이기 위해서는 아마추어 시기와 오프 시즌 그리고 불펜에서 연습 투구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앤드류 밀러 ⓒ Gettyimages

투수의 투구 동작은 그 자체로 인체 구조에 반하는 일이다. 인체의 어깨와 팔꿈치는 경첩 관절의 형태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투구 동작에 따른 외반력(팔이 뒤로 꺾이는 힘)은 굽힘과 폄 두 가지 동작만을 할 수 있으며 가장 취약한 부위인 팔꿈치에 상당한 충격을 주게 된다. 이 때문에 투수는 팔꿈치 인대가 가장 팽팽해지고 스트레스가 심할 때 공을 던지게 된다.

강속구는 또한 외반력에 맞서는 투수들의 팔에 더한 부담을 주고 있다. 불펜 투수들은 이러한 위험에 쉽게 노출되고 있다. 긴 이닝을 던져야 하는 선발투수와는 달리 불펜 투수는 대체로 투구 레퍼토리가 단순하다. 때문에 패스트볼 의존도가 매우 높다. 지난해 선발투수들의 패스트볼 구사율이 34.1%였던 반면 불펜 투수들은 40.3%에 이르렀다.

최근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구속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2008년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91.9마일. 그러나 올 시즌은 1.1마일이 더 빨라진 93마일이다. 불펜 투수들의 경우 더 빠른 패스트볼을 던지고 있다. 2008년 평균 92.7마일의 패스트볼을 던졌던 불펜 투수들의 올 시즌 평균 구속은 93.7마일에 이르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평균 94마일을 기록하기도 했다. 아직 여름이 오지 않은 만큼 투수들의 구속 더 오를 여지는 충분하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투수들의 팔에 가장 무리를 주는 것은 다름아닌 패스트볼이다. ASMI의 연구 책임자인 글렌 플라이직은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일수록 부상할 가능성이 높으며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구속의 한계치를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지난 몇 년간 토미존 수술 사례가 급증했던 이유는 현재의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과거보다 더 세밀한 관리를 받고 있는데도 그들의 팔꿈치 인대가 더 빨라진 패스트볼에 따른 충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치를 초과했기 때문이다.

▲ 2008-2017 메이저리그(선발, 불펜) 패스트볼 평균 구속 ⓒ baseball savant


결정적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불펜 투수들은 일종의 ‘소모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대부분의 불펜 투수들은 메이저리그 또는 마이너리그의 선발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이다. 패스트볼의 잠재력은 뛰어나지만 많은 이닝을 던지기에는 무리가 있거나 변화구의 완성도가 떨어져 불펜으로 밀려난 이들이 대다수다. 선수층이 두껍고 자리가 비는 포지션에 비교적 쉽게 선수를 수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부상 혹은 부진에 따른  결원이 불펜에 발생하면 언제든지 대체 요원을 구할 수 있다. ‘팬그래프’에 따르면 지난해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평균 21.5명의 불펜 투수를 기용했는데 이는 10년 전인 2007년(18.6명)에 비해 15.6% 증가한 수준이다.

야구 팬들은 김병현을 통해 메이저리그 불펜 투수가 얼마나 고된 보직인지 잘 알고 있다. 김병현 또한 순수하게 불펜으로만 풀타임 시즌을 치른 것은 3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올 시즌 메이저리그 2년째 시즌을 보내고 있는 오승환으로 다시 한번 메이저리그 불펜 투수의 업무 강도를 체감하고 있다. 롱런하는 불펜 투수가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호프만, 리베라와 같이 오랜 기간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마무리 투수들에 대한 팬들의 그리움은 점점 커지고 있다.

※ 참조 : baseball-reference, fangraphs, baseball savant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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