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 서울YMCA에서 수련한 유도 선수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유도는 태권도·복싱·레슬링 같은 격투기 종목 가운데 하나로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 등 국제종합경기대회에서 한국의 메달박스로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양권의 무술로 널리 행해지다 세계적인 스포츠로 발전해 1964년 도쿄 대회 때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핸드볼과 탁구, 배드민턴 등에 비해 올림픽 역사가 길다.

우리나라 유도의 역사는 기록으로 볼 때 고구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3세기 무렵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의 벽화가 관련 기록 가운데 하나다. 벽화에 그려져 있는 수박(手博)과 씨름 장면 등이 유도의 원형으로 추측된다. 그 그림을 오늘날의 유도와 연관 짓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때만 해도 격투기가 씨름·태권도·유도 등으로 분화되기 전이기 때문에 그런 연상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조선 시대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나오는 수박·권법의 그림에서도 유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유도와 관련된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사라졌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16세기쯤 유술(柔術)이라는 특유의 무예를 만들어 발전시켰다. 나아가 19세기 후반 가노 지고로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 오던 여러 가지 유술들을 집대성해 오늘날의 유도로 만들었다. 1906년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 된 가노 지고로는 유도를 세계적인 스포츠로 발전시켜 1951년 12월 IJF(국제유도연맹)를 결성했다. 1956년에는 제1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를 도쿄에서 열었고 제18회 하계 올림픽(도쿄)에 유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유도는 1907년쯤 일본인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며 1908년 3월 28일 비원에서 경시청의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순경들이 유도 경기를 치른 것이 국내 최초의 공개 경기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서울YMCA 체육 운동 100년사’에 따르면 서울YMCA는 1906년 유도부를 창설한 것으로 돼 있다. YMCA 운동가 전택부는 “YMCA에서 유도를 시작한 것은 1906년이다. ‘여기서 장사 100명만 양성하자’는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의 유도부 창설 발언을 출발 신호로 시작된 유도는 급격한 발전을 거듭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유도발달사’는 ‘1909년의 YMCA 유도장 설치는 한국인의 손에 의한 한국 유도장의 효시’라고 주장해 전택부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인 이상재의 뜻을 이어받은 YMCA 유도는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민족 유도로서 일제의 앞잡이였던 경찰 유도와 전혀 다른 정신 수양을 수련생들에게 쌓게 한다. YMCA가 낳은 유도 지도자 이제황은 1945년 광복 후 유도대학을 설립하고 민족 유도의 명맥을 이어 나간다. 유도대학이 오늘날의 용인대학교다.

일제 강점기 YMCA가 중심이 돼 시작된 우리나라 유도는 1948년 조선유도연맹이 결성되면서 활발하게 보급됐고 조선유도연맹은 1950년 대한유도회로 개칭했으며 1956년 5월 IJF와 JUA(아시아유도연맹)에 가입했다.

제1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는 1956년 5월 3일 도쿄 국기원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21개국 31명의 선수가 출전해 나쓰이 쇼키치가 금메달, 요시마츠 요시히코(이상 일본)이 은메달을 차지한 가운데 네덜란드의 안톤 헤싱크(1964년 도쿄 올림픽 무제한급 금메달리스트)와 프랑스의 앙리 쿠르텡이 각각 동메달을 획득했다. 유럽의 네덜란드 프랑스 두 나라는 이후 세계적인 유도 강국으로 성장한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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