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4년 도쿄 올림픽 유도 80kg급에서 동메달을 차지한 김의태(맨 오른쪽 안경 쓴 이)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일제 강점기 YMCA가 중심이 돼 시작된 우리나라 유도는 1948년 조선유도연맹이 결성되면서 활발하게 보급됐고 조선유도연맹은 1950년 대한유도회로 개칭했으며 1956년 5월 IJF(국제유도연맹)와 JUA(아시아유도연맹)에 가입했다.

제1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는 1956년 5월 3일 도쿄 국기원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21개국 31명의 선수가 출전해 나쓰이 쇼키치가 금메달, 요시마츠 요시히코(이상 일본)이 은메달을 차지한 가운데 네덜란드의 안톤 헤싱크(1964년 도쿄 올림픽 무제한급 금메달리스트)와 프랑스의 앙리 쿠르텡이 각각 동메달을 획득했다. 유럽의 네덜란드 프랑스 두 나라는 이후 세계적인 유도 강국으로 성장한다. <1편에서 계속>

1958년 제2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도 도쿄에서 개최됐으면 1961년 제3회 대회가 일본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졌다. 25개국 57명의 선수가 출전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재일동포 김의태가 동메달을 차지했다. 안톤 헤싱크가 금메달, 소네 고지(일본)가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대회까지 무제한급, 한 체급만 치러졌고 1965년 브라질에서 열린 제4회 대회부터 68kg급과 80kg급, 80kg이상급, 무제한급 등 4개 체급의 경기가 펼쳐졌다. 이 대회에서 박길순(60kg급)과 김의태(80kg급)가 각각 동메달을 획득했다.

1967년 미국에서 열린 제5회 대회에서 6체급으로 늘린 세계선수권대회는 이후 체급 조정 등을 병행하며 체급을 늘려 2015년 브라질 대회에서는 개인전 남녀 7체급 경기와 단체전이 열렸다.

1981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제12회 대회에서 박종학(71kg급)이 한국인 첫 세계선수권자가 되기 전까지 한국 선수들의 성적은 다음과 같다.

1967년 미국 대회=김병식(60kg급 동메달) 박길순(70kg급 은메달) 박청삼(70kg급 동메달) 1969년 멕시코 대회=김상철(60kg급 동메달) 김칠복(70kg급 동메달) 오승립(80kg급 동메달) 1971년 서독 대회=최종삼(63kg급 동메달) 1979년 프랑스 대회=곽우종(60kg급 은메달) 박영철(78kg급 동메달) 조재기(95kg이상급 동메달)

유도는 1961년까지 세 차례 세계선수권대회를 연 뒤 1964년 도쿄 대회 때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진입했다. 일본은 유도 경기를 치르기 위해 부도칸을 새로 짓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한국은 도쿄 올림픽 유도 종목에 박청삼 서상철 박길순 김의태 이학래 김종달 등 6명의 선수를 파견했다. 68kg급과 80kg급, 80kg이상급, 무제한급 등 4개 체급에 걸쳐 27개국 72명의 선수가 출전했으니 한국 유도 선수단의 규모는 꽤 큰 편이었다. 이는 한국 선수단 전체 규모와 연관이 있다.

도쿄 올림픽은 당시로는 최대 규모인 224명(임원 59명 선수 165명)의 선수단이 파견되는 등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됐다. 결과적으로는 북한이 대회를 보이콧해 남북 대결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1945년 남북 분단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서 스포츠를 앞세운 체제 경쟁이 예고돼 있었고 민단과 조총련으로 갈려 있었지만 60만 재일 동포들의 사기 문제도 고려해야 했다.

뒷날 외국인 코치 초빙 사업에 참여해 모국의 후배들을 지도하게 되는 김의태(80kg급)는 준준결승까지 3경기 연속 한판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으나 준결승전에서 이 체급 우승자인 오카노 이사오(일본)에게 판정패해 동메달을 차지했다. 나머지 출전 선수는 대부분 메달 문턱인 8강전에서 탈락했다. 유도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은 4개 체급 가운데 안톤 헤싱크(네덜란드)가 우승한 무제한급을 제외한 3체급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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