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펜서 헤이우드
[스포티비뉴스=조현일 해설 위원] 코트 위 존재감이나 영향력에 비해 무언가 모르게 눈에 잘 띄지 않는 선수들이 있다. 승리를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조각임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과소평가 혹은 홀대받는 18명의 선수들을 소개한다.

▲ 1947~1970년대

밥 페티트/세인트루이스 호크스(커리어 1954~1965)

리그 최초의 2만 득점 달성자로 커리어 내내 평균 20점, 12리바운드 이상을 해냈다. 빌 러셀의 셀틱스와 ‘맞짱’을 떴고 1958년에는 챔피언에 올랐다. 이 우승이 아니었다면 리그는 셀틱스의 10연패 독주로 재미가 뚝 떨어졌으리라. 경기 도중에 입었던 자잘한 부상만 제대로 치료했다면 족히 4~5년은 더 뛰었을 거다. 그 정도로 이 잘생긴 꽃미남 빅맨은 고집불통이었다.

엘진 베일러/LA 레이커스(커리어_ 1958~1972)

준우승만 8차례나 기록한 불운의 선수. 그가 불의의 부상으로 은퇴를 선언한 1971-72시즌, 마침내 레이커스가 챔피언에 올랐으니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미하엘 발락, 홍진호와 비교를 불허하는 ‘콩라인’ 의 최강자로 줄리어스 어빙, 래리 버드가 출현하기 전까지 가장 교과서적인 스몰포워드이자 동포지션 최고의 리바운드 지배자였다.

커니 호킨스/피닉스 선즈(커리어_ 1967~1976)

승부조작설에 연루되며 다소 늦은 나이인 28세부터 NBA 경력을 시작했다. 한 손으로 농구공을 움켜잡는 큰 손이 단연 돋보였는데 자유투 라인 근방에서 자유자재로 패싱을 뿌리거나 베이스라인 돌파 후 리버스 레이업으로 조무래기 수비수들을 농락했다. 마치 미니농구공을 쥐고 뛰는 듯했던 이 플레이는 줄리어스 어빙, 마이클 조던이 모방할 정도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펜서 헤이우드/시애틀 슈퍼소닉스(커리어 1969~1983)

대학을 중퇴한 이후 NBA에 진출한 첫 번째 선수. 프로 첫 해 신인상, MVP, 야투 1위를 거머쥐었는데 프로 계약과 관련한 NBA와의 오랜 법정 싸움 때문에 리그 사무국, 팬들로부터 지나친 홀대를 받았다. NBA 사무국의 정치적인 행보만 없었다면 위대한 50인 선정 당시 리그 4년차였던 샤킬 오닐이 헤이우드를 제치고 뽑히는 코미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티스 길모어/시카고 불스(커리어_ 1971~1988)

높은 야투 성공률을 원한다면? 답은 하나다. 아티스 길모어에게 볼을 주면 된다. 시카고 불스에서 전성기를 보낸 길모어는 통산 59.9%의 야투 성공률로 역대 1위에 올라 있는 득점 기계였다. NBA 사무국에 입바른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성격만큼 플레이 스타일 역시 단단했다. 그 우직함 속에 피어났던 우아한 덩크 실루엣도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밥 매카두/버팔로 브레이브스(커리어_ 1972~1986)

하프라인 근처에서 볼을 몰다가 순식간에 수비수를 제치고 드라이브-인을 꽂아 넣는다. 현란한 발놀림으로 공간을 만든 뒤 완벽한 스냅으로 중거리슛을 성공시킨다. 그런데 가드나 포워드가 아니다. 놀랍게도 센터다. 신인왕, 득점왕, MVP를 모두 거머쥔 후 급격한 추락을 경험했던 밥 매카두는 레이커스에서 제 2의 전성기를 맞으며 카림 압둘-자바의 보디가드 역할을 완벽히 해냈다.

데니스 존슨/시애틀 슈퍼소닉스(커리어_ 1976~1990)

1970년대에는 공격, 80년대에는 수비로 각각 세 차례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크지 않은 키(192cm)에도 불구하고 림을 등지는 공격으로 상대 매치업을 허수아비로 만드는가 하면 수비에서는 2선에서, 그것도 상대 빅맨을 블록하는 ‘비디오 게임’스러운 장면을 자주 연출했다. 아, 그리고 ‘그 분’, 조던이 데뷔 초기 가장 힘들어했던 수비수이기도 했다.

▲ 1980~1990년

대니 에인지/보스턴 셀틱스(커리어_ 1981~1995)

동네농구하다 보면 꼭 이런 사람들이 있다. 첫째, 움직임은 어설픈데 뭔가 효율적이며 둘째, 짜증날 만큼 달라붙는 진득한 수비력에 손이 아닌 입으로 농구하는 부류들. 1980년대, 셀틱스 왕조에서 주전 가드로 뛰었던 대니 에인지는 최고의 백인 싸움꾼이자 퀵 마우스였다. 그가 1선에서 여러 잡일을 거둬 준 덕분에 래리 버드, 케빈 맥헤일은 힘을 아낄 수 있었다.

제임스 워디/LA 레이커스(커리어_ 1983~1994)

압둘-자바가 팔을 쭉 뻗어 던지는 스카이훅으로 20점, 매직 존슨이 무지막지한 포스트-업, 수비를 다 찢어버리는 속공으로 20점을 넣는 와중에도 ‘Big Game' 제임스는 매 시즌 20점 이상을 보탰다. 플레이오프만 되면 더 미치는 두둑한 배짱 덕분일까. 레이커스는 워디와 함께 80년대에만 5개의 챔피언십을 따냈다.

제이 험프리스/피닉스 선즈(커리어_ 1985~1995)

케빈 존슨, 제이슨 키드, 스티브 내쉬로 이어지는 피닉스 명가드 계보의 선두주자. 탄탄한 기본기에 패스를 먼저 생각하는 정통 포인트가드로 커리어 평균 5.5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오른손만큼이나 왼손을 잘 썼고 종종 자신보다 30cm가량 큰 빅맨을 상대로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날리는 쇼맨십 능력도 갖췄다. KBL 전자랜드 감독 생활은 옥에 티였지만 말이다.

대럴 그리피스/유타 재즈(커리어_ 1980~1991)

스포츠에 가정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덩켄슈타인’ 그리피스가 건강했으면 어땠을까. NBA 역대 제자리 뛰기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그의 양쪽 무릎이 너덜너덜해지지 않았더라면, 조금만 힘을 빼고 뛰었더라면 80년대 서부 컨퍼런스의 향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영혼의 콤비’ 라 불리는 존 스탁턴, 칼 말론의 고생도 없었으리라.

AC 그린/LA 레이커스(커리어_ 1985~2001)

1,192경기 연속 출전 기록보다 그가 NBA 생활을 끝냈던 2001년까지 총각으로 지낸 사실이 더 놀라울 수 있다. 하지만 코트 위에서만큼은 유순한 남정네가 결코 아니었다. 지금의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덴버 너게츠보다 더 정신없이 뛰었던 ‘쇼타임’ 레이커스에서 AC 그린은 가장 느렸지만 가장 묵묵히 그리고 가장 눈에 띄지 않게 궂은 일을 해냈다.

빌 레임비어/디트로이트 피스톤스(커리어_ 1981~1994)

1980년대 NBA 악마의 아이콘은 단연 빌 레임비어였다. 심판 눈을 피해 상대 선수의 목을 조르는가 하면 엉덩이 사이에 자신의 무릎을 끼워 넣고 묘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지역 팬들을 제외하면 그를 좋아하는 NBA 팬은 아무도 없었다. 상대 선수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수없이 으르렁댔던 찰스 바클리는 1990-91시즌 도중, 레임비어에게 짤막한 내용이 담긴 친필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빌, 엿 먹어.”

▲ 찰스 오클리
▲ 1990년대 이후

찰스 오클리/뉴욕 닉스(커리어_ 1985~2004)

말년에 너무 힘겹게 커리어를 이어왔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콘로우 헤어스타일은 더욱 최악이었다. 하지만 3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오클리는 최고의 일꾼이었다. 리그 최고를 놓고 다투었던 강력한 수비, 허슬에 비해 다소 단조로운 공격 루트가 아쉬웠지만 양쪽 무릎이 고장 나며 활동량을 잃어버린 패트릭 유잉의 90년대 골밑 파트너로 그만한 인물은 없었다.

안토니오 데이비스/인디애나 페이서스(커리어_ 1993~2006)

안토니오 데이비스가 없었다면 레지 밀러가 2,560개의 3점을 터뜨리지 못했을 것이다. 두툼한 상체에서 나오는 철통같은 스크린, 볼을 향한 집념, 투박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정교한 점프슛까지. 그가 쉼 없이 빨아들인 먼지 덕분에 밀러가 이끄는 인디애나는 시카고 불스, 뉴욕 닉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마리오 엘리/휴스턴 로케츠(커리어_ 1990~2001)

점프슛을 던지지 못했다. 덩크도 겨우 림에 꽂았다. 수비수를 제칠 수 있는 일대일 기술은 아예 전무했다. 그런데 하부 리그 출신인 이 선수는 휴스턴, 샌안토니오 같은 강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모두 세 개의 챔피언 반지를 따냈다. 투지 넘치는 하이파이브로 동료들의 심장에 불을 지폈던 남자. 마리오 엘리는 1990년대, 가장 빛나는 싸움꾼이자 라커룸 리더였다.

유도니스 하슬렘/마이애미 히트(커리어_ 2003년~현재)

대학 시절만 해도 140kg가 넘는 뚱뚱보였다. 결국 프랑스 리그로 도망가다시피 가야 했다. 딱 1년 뒤, 그는 35kg을 감량하고 NBA 입성에 성공했다. 이후 8년 동안 드웨인 웨이드가 부상으로 병원 신세를 질 때에도. 샤킬 오닐이 히트 구단 뒷담화에 열을 올릴 때에도 이 선수만은 늘 제 자리를 지켰다. 플로리다 産 소나무, 그의 이름은 유도니스 하슬렘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