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왼쪽)와 권태하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그동안 2024년 여름철 올림픽 유치를 놓고 경쟁해 온 파리는 로스앤젤레스가 IOC(국제올림픽위원회)와 2028년 대회를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하는 데 합의해 하계 올림픽 개최 100년 만인 2024년에 통산 세 번째로 올림픽을 열게 됐다. 

파리는 1900년 제 2회 대회, 1924년 제 7회 대회에 이어 세 번째로 올림픽을 치르는 도시가 됐다. 로스앤젤레스도 1932년 제 10회 대회, 1984년 제 23회 대회에 이어 세 번째로 올림픽을 개최한다. 이제까지 올림픽을 세 번 연 도시는 런던(1908년 제 4회, 1948년 제 14회, 2012년 제 30회 대회)뿐이다.

파리와 로스앤젤레스가 2020년 제 32회 도쿄 대회에 이어 제 33회, 제 34회 여름철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가운데 한국 스포츠와 인연이 많은 로스앤젤레스 대회가 눈길을 끈다. 

나성(羅城)이라는 음역어와 한국의 중 규모 정도 도시 인구에 맞먹는 동포가 살고 있어 가깝게 느껴지는 로스앤젤레스가 처음으로 올림픽을 연 1932년 현재 우리나라는 제국주의 일본에 병탄된 상태였다. 

  

한국인 첫 올림피언은 권태하 김은배 황을수 

  

제국주의 일본은 1912년 스톡홀름 대회에 2명의 육상 선수를 파견한 이후 1928년 제 9회 암스테르담 대회까지 모든 여름철 올림픽에 출전했다. 한국인의 올림픽 대표 선발에 인색했던 일본은 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 이르러서야 3명의 한국 선수를 뽑았다. 이 대회 일본 선수단은 131명이었다. 성적도 좋았다. 금메달과 은메달 7개, 동메달 4개로 종합 순위 5위에 올랐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의 권태하와 김은배, 복싱 라이트급의 황을수는 1920년 한국인이 조직한 조선체육회가 뽑아 올림픽에 파견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에 나라를 강점당하고 있던 그때 일본 대표 선발전에 나갈 수 있는 조선 지역 대표는 일본인 조직인 조선체육협회가 선발하게 돼 있었다.

1932년 5월 25일 도쿄에서 열린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파견 일본 마라톤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는 츠다 세이치 등 일본 선수 4명 가운데 상위 입상자 3명이 나올 것으로 예상됐다. 일본인들 생각으로는. 그러나 권태하가 2시간36분49초로 1위, 김은배가 2시간38분3초2로 2위를 차지했다. 츠다가 2시간38분18초2로 3위였다. 최종 선발전에서 1위와 2위를 했으니 일본인들도 어쩔 수 없이 권태하와 김은배를 올림픽에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올림픽 개막을 20일쯤 앞두고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뒤 일본인 임원은 츠다에게만 코스 답사를 시켰다. 조선인 선수보다 좋은 성적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츠다는 딱딱한 도로를 달리는 데 알맞은 탄력이 좋은 신발을 마련해 놓았으나 코스 사정을 전혀 몰랐던 김은배는 서울의 흙바닥을 달릴 때 신었던 홑버선 신발 그대로였다. 탄력이 좋은 신발을 신지 못한 김은배는 현지 훈련에서 아스팔트 바닥을 열심히 달리는 바람에 무릎과 허리에 무리가 와 통증을 느끼게 됐다. 김은배는 뒤늦게 탄력이 좋은 신발을 장만했으나 컨디션을 회복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조선 지역 예선과 도쿄에서 벌어진 최종 선발전 등 두 차례 경기를 치른 데다 태평양을 건너는 오랜 선상 생활로 피로가 쌓인 권태하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마라톤 코치를 겸했던 츠다는 경기를 앞두고 권태하와 김은배에게 자기를 앞지르지 말고 달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권태하는 이 지시를 무시했지만 나이 어린 김은배는 츠다의 지시에 묶여 결국 2시간37분28초로 6위로 골인했다. 그러나 경기 도중 길가 관중들 속에서 “김은배, 뛰어라!”라는 우리말이 들렸고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는 동포들에게 김은배는 감동했다. 경기 중반 다리에 경련을 일으킨 권태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 거의 실신 상태로 비틀거리며 완주해 2시간42분52초로 9위가 됐다. 

마라톤 우승은 2시간31분36초를 기록한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소 사발라가 차지했다. 츠다는 2시간35분42초로 5위에 그쳤다. 28명의 출전 선수 가운데 20명이 완주했고 아시아인은 김은배와 권태하, 츠다 3명이었다. 

황을수는 복싱 라이트급 1회전에서 독일의 프란츠 칼츠와 잘 싸웠으나 판정패했다.

올림픽 마라톤에서 김은배가 6위, 권태하가 9위를 각각 차지했다는 소식은 겨레에게 희망을 안기는 희소식이었다. 신문들은 ‘김 군의 마라톤 입상’, ‘비장(悲壯) 권 군의 골인’, ‘조선 체육 사상 대수확’ 등 제목을 달고 레이스 경과를 상세히 보도했다. 9월 14일 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서울에 돌아올 때 동아일보는 사회면 톱에 ‘국제 무대에서 활약한 김 군의 개선’이라는 제목을 달고 크게 보도했다.

김은배는 로스앤젤레스 동포들이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베푼 한국인 선수 환영식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다. 그리고 경기 도중 동포 응원단이 흔드는 태극기에 조국을 느꼈다. 김은배는 동포가 준 태극기를 몰래 감춰 지니고 귀국해 뜻이 맞는 동아일보 기자 이길용에게 전했다. 이길용은 그 태극기를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는 날까지 지니고 있다가 광복이 되자 그 태극기를 본 삼아 여러 장의 태극기를 그려 많은 사람들에 나눠 줘 그들로 하여금 광복 만세 대열에 참가하도록 이끌었다. 

이길용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4년 뒤 열린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말살(抹殺)하는 의거를 일으킨다. 

한편 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는 미국에서 인기가 없었던 축구가 1900년 제 2회 파리 대회 이후 처음으로 정식 종목에서 빠졌다. 

  

‘반쪽 대회’였지만 첫 올림픽 톱 10에 오른 한국 

  

1984년 여름철 올림픽을 열게 된 로스앤젤레스는 전 대회인 모스크바 올림픽이 미국과 미국의 뜻을 지지하는 나라들이 대거 불참해 반쪽 대회가 된 데 따른 부담을 안고 있었다. 게다가 올림픽이 열리기 1년 여 전인 1983년 9월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탑승객 269명 전원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면서 소련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참가는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상황이 묘하게 바뀌었다. 1984년 3월 소련이 올림픽 아타셰로 임명한 인물에 대해 미국 국무부가 "KGB 스파이 같다"는 이유로 입국사증 발급을 거부하자 소련의 대회 불참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4월 들어 마라트 그라모프 소련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입국사증 발급 거부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올림픽 헌장 위반을 지적하며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개입을 요청했다. IOC와 소련, IOC와 로스앤젤레스올림픽조직위원회(LAOOC) 그리고 3자 회동이 연쇄적으로 있었고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소련의 참가를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성화의 미국 내 봉송이 시작된 5월 8일 소련올림픽위원회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협 받는 상황에선 로스앤젤레스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불가리아와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나라들이 소련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루마니아와 중국은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1949년 새로운 국가 체제를 수립한 중국은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다. 최종적으로 16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사상 최다인 140개국 6,700여 명의 선수단이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했다.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80개 나라가 참가했다. 

피터 위베로스 LAOOC 위원장은 송화 봉송 주자에게 참여비를 받는가 하면 중계권료의 대폭 인상과 스폰서 유치 등으로 수입을 늘리고 대학교 기숙사를 선수촌으로 사용하고 경기장은 기존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는 등 지출은 최대한 줄여 중앙정부나 주 정부의 재정 지원 없이도 2억1,500만 달러를 남겼다. 위베로스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경력을 바탕으로 올림픽이 끝나고 두 달 뒤 미국 프로 야구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로 선임됐다. 
▲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급 금메달리스트 하형주가 결승전에서 브라질의 더글라스 비에이라에게 굳히기 공격을 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1984년 한국 스포츠의 최대 행사도 로스앤젤레스 여름철 올림픽이었다. 한국은 다음 대회 개최국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올려야 했다. 7월 28일부터 8월 12일까지 열린 이 대회에 한국은 임원 78명과 선수 210명 등 288명의 역대 최대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역대 대회에서 거둔 금메달 1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11개를 단숨에 뛰어넘는 금메달 6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의 성적을 올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호주 등을 따돌리고 종합 순위 10위에 자리를 잡았다. 소련 등 동유럽 나라들이 불참한 가운데 올린 전적이지만 그동안 쌓아 온 한국 스포츠의 잠재력이 폭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유도는 이 대회에서 효자 종목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8명의 선수가 출전해 금메달 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로 한국이 종합 순위 10위를 차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유도는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64년 도쿄 대회에서는 4개 체급이 진행됐으니 이 대회에서는 8개 체급이 펼쳐진 가운데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이 금메달 4개를 획득해 여전히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소련 등 동유럽 나라들이 출전하지 않은 데다 한국이 2개,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1개씩 금메달을 잠식해 일본의 독주 시대가 머지않아 끝날 수 있다는 조짐을 보였다. 

95kg급에 출전한 하형주는 호쾌한 기술로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스포츠 팬들의 눈길을 크게 끌지 못하고 있던 유도를 관심 종목으로 끌어올렸다. 1회전에서 도미니카공화국의 존 애덤스를 밭다리후리기 한판, 2회전에서 캐나다의 조 멜리를 모두걸기 유효로 가볍게 물리친 하형주는 8강전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일본의 미하라 마사토를 씨름 기술을 응용한 들어메치기 절반 두 번 합쳐 한판으로 내리꽂고 4강에 올랐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93kg급(95kg급 조정 이전 체급) 은메달리스트 군터 노이로이터(서독)와 벌인 준결승은 사실상 결승전이었다. 하형주는 허리튀기로 공격하다 되치기로 효과를 빼앗긴 뒤 경기 종료 35초를 남길 때까지 이렇다 할 기술을 걸지 못해 결승 문턱에서 주저앉는 듯했다. 그러나 이 순간 하형주의 발목받치기 유효가 성공했다. 3위~5위 결정전으로 밀릴 뻔했던 하형주는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랐다.

두 명의 금메달 후보를 꺾은 하형주에게 결승 상대인 브라질의 더글라스 비에이라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경기 내내 웅크리고 도망만 다니던 비에이라는 판정으로 경기가 끝난 뒤 한판으로 지지 않은 것에 만족했는지 기뻐했다. 하형주는 올림픽 금메달 이후 1985년 도쿄 유니버시아드대회,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잇따라 우승하는 등 1980년대 한국 유도 중(重)량급의 간판 선수로 활약했다.

71kg급의 안병근은 1회전에서 아일랜드의 키어런 폴리를 곁누르기 한판, 2회전에서 엘살바도르의 후안 바르가스를 업어치기 절반 두 번 합쳐 한판으로 누인 뒤 8강전에서 1983년 세계선수권자인 일본의 나카니시 히데토시에게 주의승을 거두고 금메달로 가는 고비를 넘어섰다. 안병근은 준결승에서 영국의 케리스 브라운을 가로누르기 효과로 물리친 뒤 결승에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이탈리아의 에치오 감바를 업어치기 효과와 누르기 효과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굳히기 기술이 강했던 안병근은 이후 1985년 서울 세계선수권대회와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우승하며 1980년대 한국 유도 중(中)량급의 대표 주자로 매트를 호령했다. 

전해인 1983년 세계청소년유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19살의 신예 김재엽은 패기 있게 금메달에 도전했으나 60kg급 결승에서 일본의 호소가와 신지에게 누르기 한판으로 져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4년 뒤인 서울 올림픽으로 미뤄야 했다. 65kg급의 황정오는 은메달, 95kg이상급의 조용철은 동메달을 보탰다.

레슬링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유도에 못지않게 한국 선수단의 메달 전략에 힘을 보탰다.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에 14명의 선수가 출전해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를 차지했다. 

지난달 27일 작고한 그레코로만형 62kg급의 김원기는 조 예선에서 멕시코의 로베르토 아세베스, 엘살바도르의 구스타보 마주르, 그리스의 스틸리아노스 미기아키스를 잇따라 테크니컬 폴로 누르고 4차전을 부전으로 통과한 뒤 사실상의 조 예선 결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오사나이 세이치와 경기에서 5-4로 이겨 메달권에 접근했다. 조 예선 6차전에서 스위스의 휴고 디치를 누르고 결승에 오른 김원기는 스웨덴의 켄트올레 요한손과 접전 끝에 3-3으로 비겼으나 큰 점수(3점)를 얻어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자유형 68kg급의 유인탁은 조 예선 5번의 경기에서 3차례나 테크니컬 폴승을 거두는 등 가볍게 결승에 올라 미국의 앤드류 레인과 맞섰다. 유인탁은 어깨메어치기로 3점을 선취했으나 레인의 끈질긴 반격에 3-4로 역전당했고 다시 5-4로 뒤집었으나 경기 종료 37초를 남기고 5-5 동점을 허용했다. 유인탁은 김원기와 마찬가지로 경기 초반 얻은 큰 점수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자유형 52kg급의 김종규는 은메달을 추가했고 자유형 48kg급의 손갑도와 57kg급의 김의곤 그리고 62kg급의 이정근, 그레코로만형 52kg급의 방대두는 동메달을 보탰다. 이 대회 자유형 74kg급과 그레코로만형 74kg급에서 각각 6위와 4위에 그친 한명우와 김영남은 4년 뒤인 서울 대회에서 올림픽 챔피언의 꿈을 이룬다. 한명우는 82kg급으로 체급을 올려 우승했다. 

복싱은 9명의 선수가 출전해 금, 은, 동메달을 1개씩 획득해 올림픽 출전 사상 최고의 성적을 올리며 유도, 레슬링과 함께 제 몫을 다했다. 격투기 종목 3총사는 한국이 이 대회에서 딴 금메달 6개 가운데 5개, 전체 메달 19개 가운데 84%에 해당하는 16개를 기록하는 눈부신 성적을 올렸다. 

미들급에 출전한 신준섭은 1회전부터 준결승까지 4경기에서 모두 5-0 또는 4-1의 일방적인 판정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랐다. 한국의 올림픽 복싱 첫 금메달을 놓고 맞붙은 버질 힐(미국)과 경기는 3-2 판정 결과가 말하듯 접전이었다. 1라운드는 탐색전으로 어느 선수의 우세를 판정하기 어려웠다. 2라운드에서는 힐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 정도로 신준섭의 원투 스트레이트 공격이 주효했다. 그러나 3라운드 막바지 힐의 강력한 원투 스트레이트가 신준섭의 얼굴에 적중했다. 뒷걸음질하며 위기를 넘긴 신준섭은 마지막 남은 시간 동안 힐을 몰아붙였다. 대만과 루마니아 부심은 각각 60-58, 59-58로 신준섭의 우세를 판정했고 서독과 모로코 부심은 59-58로 힐의 우세를 인정했다. 59-59로 동점을 매긴 튀니지 부심이 신준섭의 우세를 판정해 신준섭은 올림픽 금메달에 입을 맞췄다.

웰터급의 안영수는 결승에서 미국의 마크 브릴랜드에게 0-5 판정으로 져 은메달을 보탰고 라이트급의 전칠성은 준결승에서 이 체급 금메달리스트인 미국의 퍼넬 휘태커에게 0-5 판정패해 동메달을 추가했다. 

양궁은 대회를 앞두고 내세웠던 금메달 1개와 동메달 1개 목표가 정확하게 이뤄졌다. 1979년 서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 전관왕이자 당시 2,636점의 세계 최고 기록 보유자인 김진호가 0점 실사(失射)를 두 차례나 하는 등 난조를 보이며 2,555점을 기록하며 동메달로 밀렸으나 17살의 여고생 서향순이 침착하게 경기를 펼쳐 2,568점으로 중국의 리링주안을 9점 차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여자 농구는 여자 핸드볼과 함께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여자 배구 동메달에 이어 단체 구기종목으로는 두 번째로 올림픽 메달의 기쁨을 안았다. 1967년 프라하, 1979년 서울 등 두 차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하며 실력을 확인한 여자 농구는 그러나 1976년 몬트리올 대회 때 처음으로 정식 세부 종목으로 채택된 뒤 올림픽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다. 한국은 이해 5월 쿠바에서 열린 프레 올림픽에서 6위에 그쳐 또다시 올림픽 출전의 꿈이 좌절되는 듯했으나 소련 등 동유럽 나라들이 대거 불참하면서 출전 기회를 얻었다. 

여자 농구는 6개국이 풀리그를 벌여 1위와 2위가 금메달을 겨루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국은 미국에 47-84로 크게 졌으나 유고슬라비아를 55-52, 호주를 54-48, 캐나다를 67-62로 꺾었고 결승 진출의 최대 고비인 중국전에서 69-56으로 예상 밖의 큰 점수 차 승리를 거뒀다. 한국은 결승에서 미국과 다시 싸워 55-85로 졌으나 이룰 만큼의 성적은 이룬 뒤였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 아시아 예선이 이어 세계 예선까지 통과했지만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던 여자 핸드볼은 이 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하며 4년 전의 아쉬움을 털어 버렸다. 여자 핸드볼은 여세를 몰아 1988년 서울 대회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2연속 우승하는 쾌거를 이룬다. 한국은 금메달을 딴 유고슬라비아에만 23-29로 졌을 뿐 서독과 미국, 오스트리아를 26-17과 29-27, 23-22로 꺾고 중국과 24-24로 비겨 3승1무1패로 준우승했다.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도 다음 대회 개최국 선수라는 자부심을 갖고 최선을 다해 싸웠다. 특히 남자 배구는 당시 세계 4강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A조에서 이 대회 은메달의 브라질을 세트스코어 3-1, 강호 아르헨티나를 풀세트 접전 끝에 3-2로 꺾는 등 선전하며 4강 진출을 눈앞에 뒀다. 그러나 미국이 주전을 모두 빼며 브라질에 석연찮게 세트스코어 0-3으로 지면서 미국과 브라질에 이어 조 3위가 돼 5위~8위 순위 결정전으로 밀려났다. 이어 중국과 아르헨티나를 각각 3-1로 물리치고 5위를 차지했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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