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서베를린에서 열린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한 한국 선수들(가운데)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79년 7월 19일 아침 신문을 펼쳐 든 스포츠 팬들은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국이 이런 종목에서도 세계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가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기사 내용은 김진호가 서베를린에서 열린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30m·50m·60m·70m 그리고 단체전 등 전광왕을 차지했다는 내용이었다. 모스크바 올림픽(1980년 7월 19일~8월 3일)을 불과 1년 앞뒀을 때이다.

유력한 올림픽 금메달 후보가 신데렐라처럼 나타났다. 한국의 불참으로 양궁은 모스크바 대회에서는 올림픽 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이후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한국 양궁은 금메달 23개와 은메달 9개, 동메달 7로 2위 미국(금 8 은 5 동 3)과 3위 이탈리아(금 2 은 2 동 3) 등을 압도적인 차이로 따돌리고 1위를 달리고 있다.

양궁은 올림픽 등 각종 국제 종합 경기 대회에서 최고의 효자 효녀 종목으로 단단히 한몫하고 있는 양궁이지만 김진호가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거의 대부분의 스포츠팬은 양궁(Archery)이라는 종목이 낯설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양궁은 근대 올림픽 초기인 1900년, 1904년, 1920년 대회 등 몇 차례 치러진 적이 있지만 이후 오랜 기간 올림픽과 인연을 맺지 못하다가 현대화가 이뤄진 상태에서 1972년 뮌헨 대회 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그 무렵 세계 양궁계는 미국과 소련, 핀란드, 스웨덴 등이 앞장서 이끌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1968년 전국체육대회 때 정식 종목이 됐다.

활은 아주 먼 옛날부터 인간의 생존을 위한 사냥 도구와 전쟁 무기로 사용돼 왔다. 활은 민족마다 각각의 풍토나 풍습에 따라 사용 방법이나 모양에 특징을 가진 고유의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14세기 이후 화약 무기가 등장하면서 무기의 기능을 상실하게 돼 중세에 귀족을 중심으로 활쏘기가 오락 성격이 강한 스포츠로 전환됐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스포츠의 한 종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양궁은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열렸는데 개최국인 프랑스와 이웃 나라인 벨기에 선수들만 출전해 18개의 메달을 나눠 가졌다. 이후 1920년 앤트워프 대회까지 올림픽에서 3차례 더 양궁이 개최됐는데 이 기간 강자는 벨기에와 미국 프랑스였다. 이 3개국 외에 메달을 딴 나라는 영국과 네덜란드뿐이었다.

1931년 8월 폴란드에서 제1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가 개최됐고 같은 해 9월 폴란드·프랑스·스웨덴·체코슬로바키아·미국·헝가리·이탈리아 등이 참여해 국제양궁연맹(FITA)이 창설됐다. 경기 방식 통합과 규정 정립을 거쳐 올림픽 무대에 다시 나선 게 1972년 제20회 뮌헨 대회 때다. 올림픽에서는 남녀 개인전과 단체전을 치르고 있는데 2020년 도쿄 대회에서는 남녀 혼성 경기가 추가된다.

한국에 양궁이 들어온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한국에 주둔한 외국 군인들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인이 양궁을 시작한 것은 1959년 수도여자고등학교 체육 교사였던 석봉근이 고물 수집상에게서 양궁을 구입해 남산 중턱의 국궁 연습터 석호정에서 양궁 연습을 한 것이 처음으로 알려져 있다. 1962년 주한 미군 밀런 엘로트 중령이 석호정에서 양궁 시범을 보이고 용구를 기증했으며 대한궁도협회에서 양궁을 세부 종목으로 채택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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