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금메달을 차지한 드림팀 Ⅰ 멤버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농구 금메달리스트인 드레이먼드 그린(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은 NBA 특별 영상에서 올해로 25년이 된 1992년 ‘드림팀’을 회상하며 "다시 나올 수 없는 최고의 농구 팀이었다. ‘드림팀’은 농구 자체를 바꿔 놓았다"고 강조했다.

당대 최고 수준의 선수가 본 25년 전 선배들은 어떤 수준이었을까. 그린이 영상으로만 봤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미국 남자 농구 대표 팀, 즉 드림팀을 당시 시각으로 살펴본다.

먼저 그때 미국이 왜 드림팀을 꾸리게 됐는지 간략하게 알아본다.

미국은 세계에서 농구를 가장 잘하는 선수들을 모아 놓은 리그를 운영하는 나라이고 1936년 베를린 대회에서 농구(남자)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열린 19차례 올림픽에서 15번이나 우승한 나라이며, 프로 스포츠가 성행하면서도 해마다 3월이면 아마추어인 남자 대학 농구로 한바탕 몸살을 앓는 나라이기도 하다. 게다가 19세기에 농구라는 스포츠를 만든 나라다. 과연 어느 나라가, 이러한 미국 농구의 아성을 넘볼 것인가.

미국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소련에 50-51로 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이후 이어 온 연속 우승 행진을 ‘7’에서 멈췄지만 결승전에서 있었던 심판진의 불공정한 판정을 이유로 시상식을 거부하는 등 미국 스스로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우승, 유고슬라비아)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출전하지 않았기에 ‘농구 종주국’의 자존심을 지키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달랐다. 미국은 준결승에서 리투아니아 출신 아비다스 사보니스(221cm)가 이끄는 소련에 변명의 여지없이 76-82로 지면서 동메달에 머물렀다. 경기장 분위기도 뜻밖에 소련 쪽으로 기울었다.

1940년대에 프로 농구를 시작한 미국이지만 1980년대까지 지켜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강력한 아마추어리즘과 세계 농구 수준을 얕본 미국의 자세가 맞물리며 1988년 서울 올림픽까지는 프로 선수를 출전시키지 않았다.

미국 농구 수준과 관련한 일화 하나를 잠시 소개한다.

한국은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조별 리그 7패를 포함해 9전 전패로 16개 출전국 가운데 꼴찌(개최국 일본 10위)를 했다. 올림픽 출전은 행운이었다. 10개 나라가 출전한 세계 예선에서 4위를 한 한국은 본선 출전권을 갖고 있던 아랍공화국연합(이집트+시리아)과 체코슬로바키아가 기권하자 3위인 캐나다와 함께 올림픽행 막차를 탔다.

스포츠 올드 팬 가운데에는 1960년대 후반 농구 대표 팀이 서울 용산 미군 캠프 안에 있는 체육관에서 주한 미군과 친선경기를 하는 장면을 TV로 본 적이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경기가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이 있다.

도쿄 올림픽 참패 이후 대한농구협회는 경기력 향상과 관련해 주한 미 제8군에 도움을 청했고 8군 사령부는 찰스 마콘 소위를 코치로 추천했다. 마콘 소위는 데비이슨 칼리지 주전 가드 출신이었다. 와일드 캐츠란 별명을 갖고 있는 데이비슨 칼리지는 1964-65년 시즌을 앞두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전미 대학 랭킹 1위로 꼽을 만큼 196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농구 본고장의 명문대 출신 젊은 장교는 열과 성을 다해 한국 남자 농구 대표 선수들의 훈련을 도왔다. 한국 농구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 마콘 소위가 1967년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떠나자 그의 자리를 제프 거스플 중위가 이어받았다. 거스플 중위는 페어레이 딕킨슨대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이들의 노력과 함께 미 제8군은 1968년 1월 농구 대표 팀의 미국·캐나다 원정을 지원했다. 신동파 이인표 김무현 김인건 유희형 박한 최종규 신현수 곽현채 김정훈은 미군이 제공한 군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 본고장 농구를 익혔다. 북미 원정에 코치로 참가한 거스플 중위는 이후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 일원으로 참가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마콘 소위와 거스플 중위가 떠난 뒤 한국은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필리핀을 95-86, 일본을 75-66으로 꺾는 등 8전 전승으로 드디어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 1992년 드리팀Ⅰ 멤버들.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 존 스탁턴(왼쪽부터)
서울 올림픽에서 충격을 받은 미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드림팀Ⅰ을 내보냈다.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매직 존슨 데이비드 로빈슨 패트릭 유잉 스코티 피펜 칼 말룬 존 스탁턴 래리 버드 등 NBA가 꾸릴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멤버가 모였다.

이들은 앙골라와 치른 조별 리그 A조 1차전(116-48)부터 크로아티아와 가진 결승전(117-85)까지 8경기에서 모두 100점 이상 득점하며 경기당 평균 117.3 득점에 73.5 실점의 압도적인 경기를 펼쳤다. 이들은 선수촌 입촌을 거부하고 바르셀로나 시내 호화 호텔에 묵는 등 눈꼴사나운 행동을 했지만 워낙 뛰어난 경기력을 보였기에 각국 기자들 펜 끝이 무뎌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드림팀의 우수한 경기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금메달은 땄지만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불안했던 드림팀은 인디애나폴리스(미국)에서 열린 2002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6위로 곤두박질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겨우 동메달을 건졌다. 조별 리그를 포함한 8경기에서 5승 3패의 악전고투였다. 사이타마(일본)에서 벌어진 2006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등 우수 선수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빠지는 등 드림팀 초창기만큼 동기부여가 없는 이유도 있었지만 드림팀의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가 한풀 꺾이는 듯했다. 그러나 미국은 농구 종주국다웠다.

올림픽에서는 2008년 베이징 대회 이후 3개 대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했고,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2010년 이스탄불(터키) 대회와 2014년 마드리드(스페인) 대회에서 연속 우승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결승전에서는 스페인을 101-72로 대파했고 2014년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는 세르비아를 129-92로 일축했다. 1992년 드림팀으로 되돌아간 경기력이었다.

드레이먼드 그린이 NBA 특별 영상에서 "자신이 출전한 2016년 리우 올림픽 미국 대표 팀을 1992년 드림팀과 견줄 만하냐고 묻는다면 둘 다 금메달을 땄고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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