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경 ⓒ 곽혜미 기자

[스포티비뉴스=조영준 기자] "태국은 자국 항공 회사가 연 30억 원을 지원해 줍니다. 시니어 팀만이 아닌 어린 유망주들까지 미래를 내다보며 키우고 있죠.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특정 선수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며 어린 선수들을 키울 방법을 찾지 못했어요."

한 배구 관계자의 말이다. 지난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끝난 뒤 세계 각국 여자 배구 대표 팀은 세대교체에 들어갔다. 일본과 태국도 마찬가지였다. 두 팀은 세대교체를 해도 팀 전력에 큰 손실이 없었다. 일본과 태국은 필리핀에서 열리고 있는 제19회 아시아여자배구선수권대회 결승에 진출했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이후 미래를 대비하지 못했던 한국은 위기에 몰렸다. 리우 올림픽이 끝난 뒤 곧바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적어도 미래에 대한 가능성은 증명해야 했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미봉책에 그친 대한배구협회의 대표 팀 시스템은 '마닐라 경고'의 배경이 됐다.

한국 여자 배구 대표 팀은 이번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4강에 진출했다. 대표 팀의 목표는 4강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이번 대회 4강에 들면 2020년 도쿄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201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시드 배정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은 준준결승까지 6연승하며 1차 목표에 성공했다. 그러나 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태국에 세트스코어 0-3(20-25 20-25 21-25)으로 졌다.

한국은 태국과 상대 전적에서 27승 8패를 기록했다. 태국은 한국에 '승점 자판기'로 여겨졌던 팀이다. 그러나 2000년 이후 태국은 급성장했다. 자국 모 항공사로부터 연 30억 원 가량의 지원을 받는 태국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 여자 배구를 위협하는 강팀이 됐다.

▲ 한국 여자 배구 대표 팀 ⓒ gettyimages

국제 대회 경쟁력에 대한 계획 필요한 韓 배구, 김연경만 믿고 이기려는 시절은 지났다

몇몇 선수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팀은 조직력이 탄탄한 팀을 이길 수 없다. 이런 사실은 한국과 태국의 경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태국은 지난해 올림픽이 끝난 뒤 세대교체에 들어갔다. 주전 세터 눗사라 톰콤과 미들 블로커 플룸짓 신까오카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태국의 전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들은 주니어 시절부터 풍부한 국제 대회를 경험하며 성장했다. 체계 없이 대표 팀을 급하게 구성해 내보내는 한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린 공격수들을 지휘하는 세터는 눗사라였다. 그는 2016~2017 시즌 터키 리그 페네르바체에서 김연경과 한솥밥을 먹었다. 세계적인 세터로 명성이 자자한 눗사라는 신들린 토스로 한국 블로킹과 수비를 흔들었다.

이와 비교해 한국은 가장 중요한 포지션인 세터에서 흔들렸다. 염혜선(IBK기업은행)의 토스는 그랑프리와 이번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내내 도마 위에 올랐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새롭게 가세한 이재은(KGC인삼공사)은 겨우 2~3일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고 필리핀으로 떠났다. 제아무리 공격수가 뛰어나도 팀의 야전 사령관인 세터가 흔들리면 좋은 경기를 펼치기 어렵다.

유애자 SPOTV 해설 위원은 "한동안 한국 여자 배구를 이끌어 온 세터는 김사니와 이숙자 그리고 이효희였다. 그런데 이들의 뒤를 이을 세터가 등장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미래를 위한 세터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대표 팀뿐만이 아닌 국내 무대에서도 V리그를 대표할 만한 세터가 없다. 이런 현실은 그랑프리는 물론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유 위원은 "태국의 경우 눗사라가 여전히 팀을 이끌지만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세터가 2명이나 된다. 이들은 눗사라의 경기를 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를 하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 태국 여자 배구의 기둥이자 세계적인 세터인 눗사라 톰콤 ⓒ gettyimages

무엇보다 선수들의 국제 대회 경험 부족이 아쉬웠다. 황민경(현대건설)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처음 굵직한 시니어 국제 대회에 나섰다. 유 위원은 "이번 대회에서 우리는 태국에 졌지만 선수들을 탓할 수 없다. 우리 선수들은 체계적으로 국제 대회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국내 V리그는 비슷한 기량을 지닌 선수들과 맞붙는다. 우물 안을 벗어나 국제 대회로 시선을 돌리면 실력이 훨씬 뛰어난 쟁쟁한 상대들이 있다. 유 위원은 "국제 대회는 선수 개인 기량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며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 배구 관계자는 "태국과 일본은 어린 시절부터 많은 국제 대회 경험을 쌓으며 성장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국제 대회에 비슷한 선수들만 내보내고 있다. 미래를 위한 선수 육성과 계획이 아쉽다"고 꼬집었다.

한국은 체계적인 대표 팀 성장을 등한시했다. 오로지 김연경에 의존했다. 태국은 한국과 준결승전에서 김연경의 공격 코스를 블로킹은 물론 수비 위치까지 철저하게 파악해 대응했다. 한마디로 김연경만 막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세계적인 선수는 늘 상대 팀의 견제를 받는다. 이것을 이겨 내려면 선수 본인의 활약만으로는 힘들다. 김연경을 받쳐 줄 대안은 여전히 큰 과제로 남았다.

이번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큰 교훈을 얻었다. 김연경만 믿고 이기던 시절은 지났다.

한국 배구, 태국과 일본의 시스템에 자극 받아야

현실적으로 한국이 일본과 태국처럼 여자 배구 대표 팀을 지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대표 팀에 대한 문제점을 조금이라도 인지하고 기초적인 계획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한국 배구의 발전을 위해 많은 요소가 개선돼야 한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협회가 하루빨리 나침반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배구 관계자는 "새롭게 들어선 배구협회장님은 예전과 비교해 선수들을 많이 지원해 주려고 한다. (협회장이) 공항에 직접 나가 선수들에게 금일봉을 주는 건 흔치 않았다"고 밝혔다.

지난달 제39대 대한배구협회장으로 취임한 오한남 회장은 한국 배구 발전을 위해 사재 2억 원을 출연했다. 협회는 자생력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다. 2009년 강남에 무리하게 거액을 들여 건물을 매입했을 때부터 한국 배구는 표류했다. 적폐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 관계자는 "그런데 지금 비난은 회장님이 대신 받고 있다. 예전 협회는 정말 문제가 많았다. 해결할 일은 여전히 산적해 있다. 과거부터 쌓인 문제점은 여전히 한국 배구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 2012년 런던 올림픽부터 지금까지 열정 하나만 갖고 쉬지 않고 달려온 김연경(왼쪽)과 양효진, 양효진은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부상으로 16일 조기 귀국했다 ⓒ FIVB

눈앞의 승리에 급급해 유망주들을 제대로 키우지 않는 현 지도 체계도 문제다. 한 관계자는 "가뜩이나 점점 배구를 할 어린 선수들은 줄고 있는데 이들을 체계적으로 키울 시스템은 여전히 없다"며 한국 배구의 미래를 우려했다.

이번 아시아선수권대회 결승에 진출한 일본과 태국은 새로운 얼굴이 많이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랑프리 1그룹에서 두 팀 모두 선전했고 이번 대회에서는 결승에 진출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며 걷는 자는 마지막에 웃는다. 일본과 태국은 세계적인 공격수가 없다는 점과 선수들의 평균 키가 작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 팀은 끈끈한 조직력과 경쟁력 있는 세터를 지녔다.

유 위원은 "우리 선수들이 가장 중요한 세계선수권대회 예선을 앞두고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이 경험을 발판 삼고 체력을 회복해 세계선수권대회 예선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한다"며 수고한 선수들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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