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3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73년 제7회 대회는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동서 냉전이 한창일 때로 한국은 동유럽 나라들은 물론 중국 쿠바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는커녕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그런 시기에 한국이 스포츠를 앞세워 ‘금단의 땅’인 소련에 들어갔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과 소련은 적어도 스포츠에서는 적대 관계가 아닌 사이가 됐지만 이 무렵만 해도 두 나라는 올림픽이나 국제 대회에서 만나게 되면 기량을 겨룰 뿐 서로 상대 국가에서 열리는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 통일 외교 정책에 관한 특별 성명인 6∙23 선언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남북한은 서로 내정에 간섭하지 않으며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 및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에 반대하지 않고 호혜 평등의 원칙 아래 모든 국가에 문호를 개방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우방국인 소련에도 문을 열겠다는 뜻이었다. 모스크바 하계 유니버시아드를 두 달여 앞둔 시점에 나온 선언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한국의 입국을 허용했다.

적극적인 평화 통일 의지를 밝힌 이 선언에 대해 북한은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를 인정해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모든 남북대화 중단의 구실로 삼았다. 이 같은 정세의 흐름이 남북 스포츠 교류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소련의 조치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북한은 대회에 불참했을 정도다. 그 무렵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과 첨예하게 맞서고 있던 북한의 가장 든든한 후견자는 소련이었다.

한국은 8월 15일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이 대회에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을 단장으로 임원 11명, 선수 24명 등 35명의 선수단을 보냈다. 국제 정치적인 여건의 변화 외에 IOC(국제올림픽위원회)와 FISU(국제대학스포츠연맹)를 상대로 끈질기게 교섭한 끝에 얻어 낸 스포츠 외교의 개가였다.

경기적인 측면에서도 남자 배구와 여자 농구가 동메달을 따 그 무렵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는 비교적 좋은 성적 올렸다. 이 대회에는 주최국 소련을 포함해 루마니아, 폴란드, 체코, 동독 등 동유럽 나라를 포함한 70개국 3,0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다. 동유럽 국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남자 배구는 조별 리그에서 이란과 유고슬라비아를 각각 세트스코어 3-0으로 누르고 준결승 리그에 올라 체코슬로바키아와 베네수엘라를 각각 3-0으로 꺾고 4강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진출했다. 한국은 폴란드를 3-1로 잡았으나 소련에 0-3, 쿠바에게 1-3으로 져 3위를 했다.

여자 농구는 조별 리그에서 덴마크를 90-34, 헝가리를 72-65, 체코를 68-53으로 가볍게 제치고 준결승 리그에 올라 폴란드에 55-58, 쿠바에 48-49로 졌으나 조별 리그 전적을 포함해 폴란드, 헝가리와 1승2패로 동률을 이룬 가운데 골 득실 차에서 앞서 2위로 4강에 나섰다. 한국은 강호 소련에 60-98로 졌으나 3위 결정전에서 쿠바를 48-45로 따돌리고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여자 테니스에 이순오와 이덕희가 출전했으나 단식과 복식에서 모두 메달권에 들지 못했다.

이 대회에서 소련은 금메달 69개와 은메달 35개, 동메달 30개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종합 순위 1위를 차지했다. 아시아 나라 가운데에는 일본(금 3 은 9 동 2)과 몽골(금 1 동 1), 이란(은 4)이 한국보다 좋은 성적을 올렸다.

1975년 제8회 로마 대회와 1977년 제9회 소피아 대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한 한국은 1979년 9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제10회 대회에서 남자 배구가 쿠바, 일본과 물고 물리는 접전 끝에 금메달을 차지했다. 테니스 여자 복식 김수옥-한윤자 조가 은메달을 획득해 종합 순위 15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는 소련이 금메달 31개와 은메달 26개, 동메달 16개로 1위를 차지한 가운데 미국(금 21 은 14 동 16)과 루마니아(금 14 은 3 동 14)가 그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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