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역도 발전의 발판이 된 중앙체육증진연구소 멤버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김성집 전 태릉선수촌총장은 한국이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처음 출전한 1948년 런던 올림픽 역도 미들급에서 첫 메달(동)의 기쁨을 안겨 준 주인공이다. 김 전 총장은 한국전쟁의 포연이 자욱한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또다시 동메달을 차지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김창희가 역도 라이트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이 무렵 역도는 복싱과 함께 효자 종목이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4년 5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역도는 라이트 미들급의 김성집과 밴텀급의 유인호 등 5명이 금메달을 목에 걸어 한국이 첫 출전한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일본과 필리핀에 이어 당당히 3위를 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8개 은메달 6개 동메달 5개를 땄다. 역도는 그 시절 인기 종목이었다. <1편에서 계속>
 
 
역도의 유래는 농구나 배구와 같이 근대에 발전한 종목들과 달리 분명하게 알려진 게 없다. 역도와 비슷한 형태의 경기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돌을 던지는 것은 인류가 사냥을 하면서 시작한 원초적 형태의 운동이었다. 중세 독일에서 무거운 돌을 던지는 힘자랑 형식의 대회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 같은 운동의 발전 과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역도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독일의 구츠무츠나 얀 등 체조 연구가들에 의해서다. 얀의 제자 아이젤렌에 의해 덤벨 운동의 지도서가 만들어졌다.

고대 올림픽에도 격투기와는 별도로 중량물을 사용해서 힘을 겨루는 경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독립된 경기 방법은 없고, 육상경기 달리거나 뛰는 경기에 포함해서 실시된 듯하다. 중량 들어 올리기 경기로서 일정한 규칙이 확립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서이다. 그 이전인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덤벨을 사용하는 운동경기가 있었다고는 한다.

근대 올림픽에서는 1896년 제1회 아테네 대회 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는데 한 손과 두 손 세부 종목이 있었고 현재와 같은 체급은 없었다. 한 손 종목은 오늘날의 인상과 비슷한 방식으로 선수들은 3차례 시기를 받았고 상위 3명의 선수는 또다시 3차례 시기로 순위를 가렸다.

올림픽 역도 한 손 초대 챔피언은 영국의 론체스턴 엘리엇으로 71kg을 들었다. 은메달리스트인 덴마크의 비고 젠센이 57kg을 기록했다. 두 손 종목은 오늘날의 용상과 비슷한 방식이었고 비고 젠센이 111.5kg을 금메달을, 같은 무게를 든 론체스턴 엘리엇이 은메달을 차지했다. 두 선수가 같은 무게를 든 가운데 그리스 & 덴마크 조지 황태자가 비고 젠센이 좀 더 완벽한 동작을 보였다고 판정해 희비가 엇갈렸다. 조지 황태자의 팔이 안으로 굽는 ‘편파 판정’이 있었던 듯 영국 선수단의 항의가 있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역도는 근대 올림픽 초창기에는 정식 종목에 들었다가 빠졌다가 하다가 1920년 앤트워프(벨기에) 대회부터 고정적으로 정식 종목으로 열리고 있다. 이 대회에서는 5개 체급 경기가 열렸는데 메달리스트 모두가 유럽 선수였다. 1928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처음으로 비 유럽 선수가 올림픽 역도 메달리스가 됐다. 주인공은 이집트의 엘 사예드 노스에르로 82.5kg급에서 인상 112.5kg 용상 142.5kg 추상 100kg 합계 355kg으로 우승했다. 추상은 1973년 폐지됐다.

역도도 다른 여러 종목들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에 처음 소개됐다. 이때는 역도가 아니고 역기(力技)였다. 1928년 2월 24일 서울YMCA 체육부가 개최한 제1회 서커스대회에서 현상 역기를 즉석 프로그램으로 넣어 7명의 선수가 출전해 겨룬 것이 이 땅에서 열린 첫 역도 경기였다.

1930년 11월 조선체육회 주최로 제1회 전조선역기대회가 열렸다. 1928년 서울YMCA가 역기대회를 열었으니 그보다 2년 뒤늦었으나 이 대회는 이규현, 박종영, 이병학, 서상천 등이 조직한 조선체육증진연구소가 1930년 9월 중앙체육증진연구소로 이름을 바꾼 뒤 처음으로 후원하는 대회라 주목을 끌었다. 당시는 제대로 된 역도 기구가 없어 플레이트를 시멘트로 만들거나 궤도용 소형 화차의 쇠바퀴를 사용해 연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대회 경량급에는 11명이 참가해 장삼현이 우승했고 중량급에는 12명이 출전해 원희득이 우승했지만 얼마를 들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3편에 계속>

관련기사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