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스 히딩크 감독 선임도 응급처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한희재 기자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어렵사리 9회 연속, 통산 10회 월드컵 진출에 성공한 축구 국가 대표 팀 경기력에 대한 축구 팬들의 불신이 사령탑 교체 문제 제기로 이어지면서 쉬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종목을 막론하고 국가 대표 팀과 관련한 갖가지 말썽은 선수 선발에서부터 문제가 시작한다. 도(道) 대표로 전국체육대회에만 나가도 영광인데 나라를 대표해 국제 대회에 출전하는 건 운동선수에게 최고의 영예다.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달고 싶은 건 프로든 아마추어든 모든 운동선수의 꿈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에 합격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다. 문제는 국가 대표 선수를 뽑는 기준이 기록 종목을 빼고는 각종 고시나 토플 같은 테스트들처럼 점수로 객관화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런 종목 국가 대표 팀 감독과 관련한 비난이나 비판, 불신 등은 선수 선발이 출발점이다.

“○○○은 감독이 나온 대학 후배라더라”, “○○○은 감독과 친한 경기인 출신 ○○○ 아들이라더라” 같은 말들이 대표 팀 구성 직후 돌기도 하고 나아가 대회 기간에는 “○○○은 감독 팀 소속 선수여서 실력이 그저 그런데도 계속 주전으로 뛴다더라” 같은 말들로 이어진다.

요즘 들어 많이 누그러졌다고는 하지만 스포츠 분야도 사회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학연 지연 등으로 얽혀 있다. 국가 대표 팀 선발과 관련해서는 그 정도가 더할지도 모른다.

국내 대표적 인기 종목인 축구와 야구, 농구를 보면 오랜 기간 연세대와 고려대 출신들이 협회 집행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인기 4대 구기 종목 가운데 하나인 배구가 빠진 까닭은 두 학교가 펼치는 정기전에 이 종목이 없기 때문이다.

두 학교 출신 인사들이 협회를 휘어잡고 있던 시절 두 학교 입학은 국가 대표로 가는 직행 버스 티켓을 손에 쥔 것과 같았다. 물론 일제 강점기부터 운동부를 육성하고 농구 같은 경우 연희전문(연세대 전신)과 보성전문(고려대 전신)이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수준 높은 경기력을 보였고 이들이 해방 후 협회를 운용하는 주축 인물이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리고 두 학교의 종목별 경기력은 상당 기간 다른 학교들이 따라잡기 어려웠다.

이들 종목 가운데 축구는 워낙 선수가 많아 경희대 한양대 건국대 등 여러 학교 선수들이 국가 대표 팀에 뽑히면서 일찌감치 두 학교 구도가 깨졌다. 농구는 신세대 팬들도 잘 알고 있듯이 ‘허동택’ 트리오가 중앙대 유니폼을 입으면서 두 학교가 주도하는 판도를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 야구도 한양대 동국대 등이 아성과 같았던 연·고대 판을 흔들었고 프로화 이후에는 두 학교가 종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해졌다.

연세대와 고려대로 대표되는 학연을 사례로 들었지만 또 다른 인연들이 곳곳에 얽히고 설켜 있는 게 국내 스포츠계 현실이다.

이런 고질적 병폐를 단숨에 날려 버린 이가 거스 히딩크다. 그런데 잠시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 보면 히딩크 선임도 응급처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외국인 지도자 영입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인 히딩크 감독조차도 2002년 한일 월드컵을 1년7개월여 앞두고 한국 대표 팀을 맡았다. 단기 처방에 가까웠다.

그 이전에는 적지 않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1967~68년 독일인 에카르트 크라우츤이 한국 청소년 대표 팀을 지도했고 1971년 영국인 애덤스가 국가 대표 팀 코치로 일하면서 외국인 지도자와 한국 축구의 인연이 시작됐지만 이들은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1991년 1월 독일인 데트마르 크라머가 올림픽 대표 팀을 맡았으나 국내 지도자들의 '흔들기'를 견디지 못하고 1992년 3월 귀국길에 올랐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아나톨리 비쇼베츠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1승1무패로 8강 진출에 실패했으나 한국 축구를 한 단계 끌어 올리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도 경기인들과 갈등 문제 등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안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히딩크 이전에는 비쇼베츠 정도를 빼고는 성공작이라고 할 만한 영입 사례가 없다. 히딩크 이후에도 움베르투 쿠엘류, 요하네스 본프레레,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울리 슈틸리케를 거치며 외국인 사령탑이 차례로 흔들렸다.

이렇게 많은 실패 사례가 있는데도 축구 애호가들은 왜 외국인 사령탑을 원할까. 외국인 지도자가 요술 지팡이라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1980년대 어느 감독이 국가 대표 팀 지휘봉을 잡고 있을 때 대표 팀 유니폼을 하루라도 입은 선수가 70명쯤 된다는 말이 돌았다. 자기 팀 선수도 챙기고, 이러저런 이유로 뽑은 선수도 있었을 터. 아무튼 그때보다 선수층이 두꺼워졌다고는 하지만 국가 대표 후보군은 이 정도를 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얘기는 원래 위치로 돌아간다. 국가 대표 팀 운용은 선수를 뽑는 데서 출발한다. 사심 없이 최대한 객관화해 진짜 실력으로 선수를 발탁해 국가 대표 팀을 꾸려야 한다. 태극 마크는 꼭 달아야 할 선수가 달아야 한다.

1980년대 이전에는 협회 어른들이 앞에 나온 두 대학교 선수들의 국가 대표 팀 선발 비율을 조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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