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4년 도쿄 올림픽 레슬링 은메달리스트 장창선(가운데) 오른쪽은 1960년대 한국 스포츠를 이끈 민관식 대한체육회 회장. 장창선과 민관식 회장(작고)은 대한체육회 선정 스포츠 영웅이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14일(한국 시간) 페루 리마에서 열린 제131차 총회에서 파리(프랑스)와 로스앤젤레스(미국)의 유치 발표를 지켜본 뒤 투표를 거쳐 만장일치로 두 도시를 2024년, 2028년 여름철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했다.

이로써 2020년 도쿄에 이어 2020년대에 열릴 3차례 여름철 올림픽 개최 도시가 모두 정해졌다. 겨울철 올림픽은 2022년 베이징 대회만 결정돼 있고 2026년 대회는 캘거리(캐나다, 1988년 대회 개최), 인스부르크(오스트리아, 1964년 대회 개최), 릴레함메르(노르웨이, 1994년 대회 개최), 시온(스위스) 등이 유치 경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2026년 겨울철 올림픽 개최 도시는 2019년 7월 밀라노(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제134차 IOC 총회에서 결정될 예정이다.
 
2020년대에 열리는 3차례 여름철 올림픽 개최 도시는 한국 스포츠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다.

도쿄는 1964년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여름철 올림픽을 치렀다. 도쿄는 1940년 여름철 올림픽을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자기들이 일으킨 중일 전쟁 여파로 취소했다. 전범국으로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일본은 1959년 뮌헨(당시 서독)에서 열린 제55차 IOC 총회에서 디트로이트(미국)와 빈(오스트리아), 브뤼셀(벨기에)을 1차 투표에서 제치고 제18회 여름철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이 대회는 여러모로 한국과 인연이 많았다. 중·장년 스포츠 팬들이 기억하는 ‘신금단 부녀 상봉’이 이 대회를 앞두고 극적으로 이뤄졌고 북한은 대회 직전 국호(DPRK-North Korea) 문제를 트집 잡아 보이콧을 선언했다. 겉으로 내세운 문제는 국호 문제였지만 실상은 당시 육상 여자 중거리 세계 최강자였던 신금단이 ‘가네포(The 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 신생국경기대회)' 출전 때문에 IOC로부터 올림픽 출전 자격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체제 선전 효과가 별로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재일거류민단과 재일조선인총연합회로 갈려 있긴 했지만 60만 재일 동포의 사기 문제도 있고, 결과적으로 불발됐지만 남북 스포츠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당시로는 최대 규모인 224명(임원 59명, 선수 165명)의 선수단을 꾸렸다.
 
경기력적인 측면에서 썩 성공적인 대회는 아니었다. 정신조는 복싱 밴텀급 결승전에서 사쿠라이 다카오에게 2라운드 1분10초 만에 RSC로 졌고 장창선은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 결승전에서 요시다 요시가츠에게 판정으로 패했다. 1948년 런던 대회 이후 꾸준히 메달에 도전해 온 레슬링이 거둔 첫 번째 올림픽 메달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의가 있었다. 유도 80kg급에 출전한 김의태는 준준결승까지 3경기 연속 한판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으나 준결승전에서 오카노 이사오에게 판정으로 졌다. 세 선수 모두 금메달로 가는 길목에서 홈의 이점을 안고 있는 주최국 일본 선수들과 마주친 아쉬움이 컸다.
 
1900년 제2회, 1924년 제8회 대회를 개최한 파리는 두 번째 대회를 연 지 100년 만인 2024년 올림픽을 유치해 기쁨이 배가됐다. 파리 올림픽과 한국 스포츠는 직접적인 인연은 없다. 제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하기 직전, 또는 병탄하고 10년여가 지난 시점에 열린 올림픽이기 때문이다.

▲ 차기 올림픽 개최국인 한국 선수단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주 경기장인 메모리얼 콜로세움에 입장하고 있다. 기수인 하형주는 유도 95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대한체육회
 
이 대회들과 한국 스포츠가 연결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을 소개한다.

아시아 나라 가운데는 인도가 1900년 파리 올림픽에 처음으로 출전했으며 일본은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필리핀은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처음 참가했다. 1924년 파리 대회에는 인도(7명) 중화민국(4명, 개회식에만 참석) 일본(9명) 필리핀(1명) 등 아시아 나라 선수 21명이 출전했다. 일본은 이 대회 레슬링에서 동메달을 땄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그리고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이 각각 그들의 NOC(국가올림픽위원회) 이름 아래 올림픽에 출전했다는 사실이다. IOC가 완전히 독립된 국가뿐만 아니라 일정한 요건을 갖춘 지역의 NOC 설립도 인정한 데다 영국이나 미국이 각각 인도와 필리핀의 NOC 조직을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와 필리핀 이름으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에는 그런 아량이 없었고 또한 당시 우리 체육계가 독자적인 NOC를 구성하려고 힘썼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국내 체육계가 올림픽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20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이 창간되고 이 신문들이 체육 진흥을 외치면서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해 앤트워프(벨기에)에서 열린 올림픽에 대한 언급이 신문 사설에 나타난다. 안트워프 대회에 아시아 나라로는 인도(5명)와 일본(15명)이 출전했고 일본은 테니스에서 2개의 은메달을 차지했다.
 
1932년과 1984년 두 차례 올림픽을 연 로스앤젤레스는 한국 스포츠와 많은 인연을 맺고 있다.
 
한민족이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가 처음이다. 이 대회에 마라톤의 김은배, 권태하, 복싱의 황을수 등 3명이 일본 대표 선수로 참가했다. 이 대회 마라톤에서 김은배는 6위, 권태하는 9위를 각각 차지했다.
 
그런데 이들은 1920년 7월 한국인이 조직한 조선체육회(오늘날의 대한체육회)가 뽑아 올림픽에 나선 게 아니었다. 일본에 나라를 강점당하고 있던 그때 일본 대표 선발전에 나갈 수 있는 조선 지역 대표는 일본인 조직인 조선체육협회가 선발하게 돼 있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23회 여름철 올림픽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둔 의미 잇는 대회이기도 했고 52년 전 3명의 한국인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뛰거나 싸워야 했던 설움을 씻는 대회이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둔 국민적 성원이 있었기에 임원 78명과 선수 210명 등 288명의 역대 최대 규모의 한국 선수단은 이전 대회에서 거둔 금메달 1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11개를 단숨에 뛰어넘는 금메달 6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의 성적을 올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호주 등을 따돌리고 종합 순위 10위에 자리하는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소련 등 동유럽 일부 나라들이 불참한 가운데 올린 전적이지만 그동안 쌓아 온 한국 스포츠의 잠재력이 폭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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