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48년 런던 올림픽 출전한 한국 선수단의 입촌식 장면. 한국 선수단에는 역도 선수 8명이 포함돼 있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39년 제10회 메이지신궁대회에서는 이규혁(54kg급), 남수일(60kg급), 조택희(67kg급), 이영환(82kg급)이 왕좌에 올랐다. 남수일은 세계신기록으로, 이영환은 일본 신기록으로 각각 우승했다.

1940년 제11회 메이지신궁대회부터는 매년 개최로 바뀌지만 중국 대륙 침략이 장기전의 수렁에 빠져 있는 데다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하기 1년 전 이었던 탓에 이른바 국방 경기가 대두돼 메이지신궁대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역기에서는 박동욱(56kg급)과 김성집(75kg급)이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고 남수일(60kg급), 이병돈(67.5kg급), 이영환(82.5kg급)도 각각 우승했다.

한마디로 1930년대 후반 조선의 역기 실력은 축구 농구 복싱 등과 함께 일본을 압도하고 있었다. <3편에서 계속>
 
1945년 8월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경기 단체들은 대한체육회 주관 대회 외에 자체적으로 대회를 치르기 시작했다. 1948년 대한역도연맹으로 개칭하기 전인 1946년 5월 조선역도연맹은 제1회 전국역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일제 강점기부터 활약한 60kg급 남수일이 추상에서 107㎏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한국은 1947년 8월 국제역도연맹에 가입했으며 그해 9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 3명의 선수가 출전해 60㎏급 남수일이 2위, 75㎏급 김성집이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6개 전 체급에서 우승한 미국(금 6 은 3 동 1)에 이어 캐나다(은 1 동 1)와 종합 순위 공동 2위에 올랐다. 해방 직후 혼란한 시기에 보스턴 마라톤 대회와 함께 신생 대한민국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쾌거인데 마라톤에 가려 덜 알려진 측면이 있다. 잇다. 국 복스턴 환란세계역도선수권대회는 제1회 대회가 1891년 런던에서 열렸다.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 가운데 역사가 긴 종목에 속한다. 1947년 대회는 제26회였다.

이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이란과 일본은 물론 태국과 필리핀에도 밀리는 암흑기가 이어졌다.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1970년 대회 67.5kg급 용상에서 원신희가 3위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단 한명의 입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앞서 설명했듯이 해방 직후 한국 스포츠를 이끈 종목 가운데 하나다. 1946년, 조선체육회는 2년 앞으로 다가온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올림픽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올림픽에 나가고 싶은 나라는 NOC(국가올림픽위원회)를 구성하고 올림픽 종목 경기 단체가 5개 이상 국제경기연맹에 가맹하고 있어야 IOC의 승인을 받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다.

조선체육회는 부회장인 유억겸을 올림픽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앉히고 전경무와 이상백에게 부위원장을 맡겼다. 올림픽대책위원회는 국내 경기 단체가 구성돼 있는 역도와 육상, 축구, 복싱, 농구, 사이클 등 6개 경기 단체의 정관을 영문으로 번역해 국내 아마추어 규정과 함께 각각의 국제경기단체에 제출해 가입하도록 이끌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한체육회는 역도와 육상, 축구, 농구, 복싱, 레슬링, 사이클 등 7개 종목 67명의 런던 올림픽 선수단을 구성했다. 선수단 규모 조정 문제와 관련해 우여곡절 끝에 역도는 이규혁과 박동욱(이상 56kg급) 남수일과 최항기(이상 60kg급) 김창희와 나시윤(이상 67.5kg급) 김성집(75kg급) 이영환(82.5kg급) 등 8명이 선수단에 포함됐는데 단체 종목인 축구오 농구를 빼고 육상(9명) 다음으로 많았다.

런던 올림픽 한국 선수단은 1948년 6월 21일 종로2가 서울 YMCA 회관에 모여 시민들의 열렬한 환송 속에 서울역까지 걸어간 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배편으로 후쿠오카에 간 뒤 그곳에서 기차 편으로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배편으로 홍콩으로 간 뒤 홍콩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항공기를 이용해 방콕→캘커타(오늘날의 콜카타)→바그다드→아테네→로마→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에 도착했다.

홍콩으로 가는 배 안에서 역기를 들고 훈련한 김성집은 추상에서 올림픽 신기록인 122.5kg으로 1위를 차지했으나 용상에서 3위(145kg) 인상에서 4위(112.5kg)으로 밀리며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성집 외에 56kg급의 이규혁과 60kg급의 남수일이 각각 4위, 67.5kg급의 김창희가 6위에 입상했다. 역도는 일제 강점기 후반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남수일은 1939년 제10회 메이지신궁대회에서 세계기록으로 우승했고 김성집도 1940년 제11회 메이지신궁대회에서 역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정상에 올랐다. 이들이 전성기였던 1940년과 1944년, 올림픽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열리지 않은 건 무척 아쉬운 일이다.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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