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남녘의 아버지와 극적으로 상봉한, 그 무렵 육상 여자 중거리 세계 최강 신금단(왼쪽)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북한은 지난 20일 태국에서 열린 2018년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 아시아 예선 B조에서 6년 만에 만난 한국에 세트스코어 0-3(17-25 23-25 19-25)으로 졌다. 세트스코어로 보면 완패지만 내용 면에서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홍성진 한국 여자 배구 팀 감독이 경기 후 인터뷰에서 "북한이 2011년 아시아선수권대회 때보다 훨씬 강해져서 돌아왔다"며 "리시브와 디그가 뛰어났다"고 말했을 정도다.

북한은 한국에 진 뒤 이란과 베트남을 각각 세트스코어 3-0으로 물리쳤고 태국에 0-3으로 져 2승2패를 기록해 출전 5개국 가운데 3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한국 배구 관계자들이 주목한 북한 선수 가운데에는 정진심(26·182cm)과 김현주(14·182cm)가 있다. 정진심이 주 공격수로 북한 여자 배구의 현재라면 김현주는 북한 여자 배구의 미래다. 이번 대회에서 확인한 북한 여자 배구 수준은 머지않아 아시아 중·상위권 수준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북한 여자 배구는 그렇게 성장할 만한 전통이 있다.

북한은 한국보다 10여년 앞서 195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회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17개국 가운데 8위를 했고 1962년 제4회 대회(소련 모스크바)에서는 출전 14개국 가운데 10위를 하는 등 다른 어느 종목에 비해 세계 무대에 일찌감치 진출했다. 이는 여자 배구가 강한 소련 등 동유럽 나라들의 영향이 컸다. 1970년대의 정진심이라고 할 수 있는 김증복(당시 나이 27살)을 앞세워 동메달을 딴 1972년 뮌헨 올림픽 직전인 1970년 제6회 대회(불가리아 바르나)에서는 소련과 일본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이 세계선수권대회에 처음 나선 건 1967년 제5회 대회였고 한국과 미국, 일본, 페루 4개 나라가 출전한 이 대회에서 3위를 기록했다. 반쪽이 아닌 대회에서 처음으로 3위에 오른 건 1974년 제7회 대회(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였다.
뮌헨 올림픽에서 한국은 조별 리그 A조에서 소련에 1-3으로 졌으나 헝가리와 서독을 각각 3-0으로 완파하고 조 2위가 돼 준결승에서 일본과 만났으나 0-3(3-15 5-15 9-15)으로 졌다. 한국은 3위 결정전에서 당시 상당한 수준의 경기력을 보유하고 있던 북한에 0-3(7-15 9-15 9-15)로 완패했다. 북한의 여자 배구 동메달은 2017년 현재 북한이 올림픽 단체 구기 종목에서 획득한 유일한 메달이다.

2년 뒤인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일본에 1-3으로 졌으나 북한을 3(15-6 15-5 15-9)0으로 꺾고 2년 전 패배를 갚았다. 한국은 북한뿐만 아니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 등에 빛나게 될 중국을 3-0으로 꺾으며 은메달을 차지했다. 뮌헨 올림픽 동메달의 북한은 주 공격수 김증복의 은퇴 등 급격한 세대교체 속에 1승3패로 4위에 그쳤다. 이때를 기점으로 북한 여자 배구는 침체기에 들어섰다.

1986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열린 제10회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했으나 16개 출전국 가운데 4위에 그쳤다. 이 대회에서는 중국이 1위, 일본이 7위, 한국이 8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 이후 북한은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자취를 감췄다.

북한도 배구뿐만 아니라 여러 종목에서 여자 선수들의 활약상이 한국에 못지않다.

2016년 리우데자이루 대회까지 여름철 올림픽에서 북한이 획득한 메달은 54개(금 16 은 16 동 22)인데 그 가운데 21개(금 6 은 8 동 7)를 여자 선수들이 거둬들였다.

겨울철 올림픽에서는 은메달 1개와 동메달 1개를 모두 여자 선수들이 기록했다.

북한 여자 스포츠는 지난 반세기여 동안 올림픽 성적뿐만 아니라 육상 축구 등 일부 종목에서 세계 정상의 기량을 자랑했다.
1960년대 신금단과 한필화는 육상 중거리와 스피드스케이팅의 세계적인 선수였다. 신금단은 정치적인 문제로 북한이 출전하지 못한 1964년 도쿄 올림픽에 나섰다면 400m와 800m에서 금메달이 유력했다. 신금단은 이 종목의 당시 세계 최고 기록을 갖고 있었다. 한필화는 1964년 인스부르크 겨울철 올림픽 3,000m 은메달리스트다.

신금단의 뒤는 1999년 세비야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한 정성옥이 이었다. 

왼손 펜홀드 드라이브 전형에 스카이서브를 구사한 박영순은 1977년 버밍엄, 1979년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식에서 연속 우승했다. 탁구에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는 한민족이지만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 단식에서 두 차례 정상에 오른 이는 박영순이 유일하다. 그때나 이제나 중국 탁구의 위세는 대단한데 이질 라버의 거신아이, 스카이서브의 장더잉이 세계 무대를 주름 잡던 시절에 이룬 뛰어난 성적이다.

박영순의 뒤는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 우승의 주역 리분희와 유순복이 이었지만 박영순만큼의 성적은 남기지 못했다.

신세대 스포츠 팬들에게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유도 48kg급 금메달리스트인 계순희가 익숙할 것이다. 또 신세대 축구 팬들은 8번 열린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두 차례 우승과 한 차례 준우승, 4위 한 차례 그리고 4번 벌어진 17세 이하 월드컵에서 두 차례 우승과 한 차례 준우승, 4위 한 차례를 기록한 북한 여자 축구에 강한 인상을 갖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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