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글 유현태 기자, 영상 장아라 기자] 한국 축구에서 가장 충격적이었을 경험, 아마도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전이 아니었을까. 1986년 월드컵 무대에 복귀한 뒤 가장 큰 점수 차로 패한 경기이기도 했거니와, 네덜란드는 한국 축구가 강조하던 투지 또는 정신력으로 넘기엔 확실한 실력차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아약스-인터밀란-아스널을 거치며 세계 최고의 섀도 스트라이커로 활약한 데니스 베르캄프가 있었다. 베르캄프는 한 수 위의 드리블과 움직임으로 한국 수비진 사이를 헤집었다. 유상철, 이민성, 서정원 등 수비 사이를 섬세한 볼 컨트롤로 지나는 장면은 아직도 한국 축구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 베르캄프는 후반 26분 직접 네덜란드의 세 번째 골을 기록했다.

한국 팬과 첫 만남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베르캄프는 사실 유럽을 호령하는 공격수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프리미어리그를 앞에서 끌고 가는 아스널을 대표하는 선수였다. 그는 아스널에 3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4번의 FA컵 우승을 안겼다. 영혼의 단짝은 윙어에서 스트라이커로 전향하며 '런던의 왕'으로 군림한 티에리 앙리였다. 사석에선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경기장에서는 찰떡궁합을 뽐냈다.

베르캄프는 아스널의 마지막 프리미어리그 우승으로 남아 있는 2003-04 시즌 우승의 주역이었다. 당시 아스널은 그야말로 '최강'이란 칭호에 어울렸는데, 앙리와 베르캄프를 비롯해 솔 켐벨, 파트릭 비에이라, 로베르 피레 등 세계 최정상 선수들이 모인 팀이었다. 2003-04 시즌 26승 12무를 거두며 '무패 우승'이란 신화를 만들었다.

최고의 장점은 환상적인 트래핑과 퍼스트 터치였다. 키가 188cm로 장신이었지만 섬세하게 패스를 잡아 놓는 능력이 뛰어났다. 단번에 슛이든 패스든 다음 플레이로 넘어갈 수 있도록 공을 잡아뒀다. 그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것이 2001-02시즌 뉴캐슬 유나이티드전에서 터뜨린 골이다. 수비수를 두고 공을 반대 방향으로 친 뒤 다시 공을 잡아 마무리하는 장면은 도저히 글로 설명할 수 없는 환상적인 기술이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르헨티나와 8강전에서 나온 골 장면 역시 팬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왼쪽 측면에서 길게 넘어온 롱패스를 껑충 뛰어 올라 발 아래 잡아 놓고 수비수를 제친 뒤 득점에 성공하는 장면은 그의 기술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의 우아한 플레이는 많은 팬들을 사로잡았다. 몸싸움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투박한 플레이보다 부드럽고 영리한 플레이로 수비수들을 뚫었다. 간결한 퍼스트터치 뒤 허를 찌르는 절묘한 슛은 그의 전매특허와 같았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기술보다도 힘과 기술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잉글랜드 무대에서 베르캄프는 누구보다 우아한 선수였다.

섀도 스트라이커로서 도움 능력도 탁월했다. 베르캄프는 프리미어리그 315경기에 출전해 87골과 94도움을 기록했다. 영리하게 움직이며 공격수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고 필요한 때는 도움도 올렸다. 득점력과 도움 능력을 모두 갖춘 베르캄프와 앙리는 서로 상생하며 아스널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여기에 이야기를 더할 요소도 있었다. 베르캄프는 1994년 미국 월드컵 이후 비행기 공포증이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원정 경기를 다닐 때도 비행기를 제외한 다른 교통 수단을 활용하거나, 장거리 원정엔 불참하기도 했다. 그래서 붙은 그의 별명은 '논 플라잉 더치맨.' 빠른 발로 측면을 돌파했던 마크 오베르마스의 별명 '플라잉 더치맨'의 변형이었다. 프리미어리그를 호령하는 실력자가 트라우마 때문에 장거리 원정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드라마 같았다.

베르캄프는 백조처럼 우아한 플레이를 펼치면서 2005-06 시즌까지 활약한 뒤 은퇴했다. 그는 2005-06시즌 아스널의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하며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준우승을 거뒀다. 그 이후 아스널은 단 한 번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베르캄프의 은퇴 때문이라곤 말할 수 없지만, 베르캄프는 곧 아스널의 전성기를 나타내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유럽 클럽대항전에서 거둔 성과는 2번의 UEFA컵(현 유로파리그, 1991-92 시즌 아약스, 1993-94 시즌 인터 밀란) 우승이다.

▲ '논 플라잉 더치맨' 데니스 베르캄프(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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