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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의 축구환상곡] 故 조진호의 ‘축구 인생 복기’, 다 못 전한 이야기

한준 기자 hjh@spotvnews.co.kr 2017년 10월 11일 수요일
▲ ⓒ한국프로축구연맹

[스포티비뉴스=한준 기자] 취재원과 인터뷰를 하게 되면,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까지 약속을 잡는다. 하지만 때로, 인터뷰를 하다 보면 서로 이야기에 빠져들어 서너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나중에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고자 하면 꽤 일이 복잡해지지만, 그렇게 진행된 인터뷰에 진심과 진정성이 담겨 독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10일 유명을 달리한 故 조진호 감독과 취재원으로 가까워진 것은, 필자가 대전시티즌 담당 기자로 일하던 2013년부터다. 2013시즌 말 조 감독은 대전의 수석코치였는데, 팀이 강등 위기에 처한 가운데 김인완 감독이 사임하면서 감독 대행이 됐다. 결국 강등을 막지 못했으나 시즌 막판 연승행진으로 희망을 살렸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4시즌 정식 감독이 되어 K리그 챌린지 우승으로 승격을 이뤘다. 

조진호 감독의 승격, 그리고 2015시즌 클래식 도전이 실패로 돌아간 시점까지 현장에서 자주 봤다. 압도적인 성적으로 챌린지 우승을 확정한 뒤 1년을 돌아보며 가진 인터뷰는, 조 감독 특유의 소탈함과 유쾌함 외에 축구에 대한 그의 깊이있는 시각과 철학을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조 감독과 인터뷰 역시 예상한 시간을 훨씬 지나도록 이어졌고, 그 대화의 기억이 후에 사석에서 따로 만나 밥 한 끼, 술 한 잔 하며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로 이어졌다. 그런 조 감독의 갑작스런 별세 소식은, 늘 밝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필자에게도 충격이었다.

당시 조 감독의 선수 시절을 돌아보는 글을 기고할 기회도 있었는데, 지면의 한계로 인해 모든 이야기를 담지 못했다. 조 감독의 지도철학에 대해선 따로 기사화해 그가 남기고자 한 메시지를 온전히 담았는데,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그때 다 소화하지 못한 이야기를,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다. 조 감독은 상주상무와 부산아이파크 감독으로도 승승장구했지만 필자의 담당 팀이 아니라 그에 관한 기사를 쓰지 못했다.

꽤 시간이 흘러, 그를 추모하는 기사를 쓰게 됐다. 3년 전 인터뷰에서 묵혀버린, 조 감독의 다 못 전한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조 감독은 부산에서 K리그 클래식 승격과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이라는 겹경사를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미션을 완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조 감독이 한국 축구계에 남긴 족적이 영원히 기억되고, 유산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의 ‘옛 이야기’를 전한다. 필자의 해석이나 첨언없이, 그가 남긴 육성의 뉘앙스를 살려, 그가 자신의 축구 인생을 돌아보고, 그렇게 쌓은 경험으로 지도자가 되어 구현하고 싶었던 리더십을, 가감없이 전한다.

▲ 1991년 세계 청소년 대회에 남북단일팀 선수로 참가 ⓒ대한축구협회

◆ 소년 조진호, #타고난_드리블 #슈퍼리그_볼보이 #마라도나_흉내내기

“초등학교 때부터 드리블을 해서 선수를 제치는 것은 타고난 것 같다. 축구 스타일이 공격적이게 됐다. 백패스보다 앞으로 돌진하는 스타일. 많이 뛰면서도 세밀하게 뛰려고 많이 노력했다. 축구공 하나만 있으면 동네 친구들하고 골대 두고 많이 했다. 초등학교 1,2학년부터 애들과 놀고 뛰어다니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마라톤하듯 엄청 뛰었다. 축구가 가장 재미있더라.”

“동네 축구를 하면서 어렸을 때는 축구가 지금처럼 활성화가 안되어서. 동네에서 터득했다. 대구 신흥초등학교 4학년 초반 반대항 대회를 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서 축구부에 뽑혔다.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축구를 했다. 축구부 지도자가 축구를 해보라고 해서 들어갔다. 키는 작았는데 드리블도 잘하고 그 대회에서 가장 잘했다. 1년 정도 하고 있었는데 5학년 때 축구부가 해체됐다. 축구를 계속 하고 싶어서 박주영이 나온 반야월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본격적으로 배워보니 더 재미있었고 잘됐다. 키는 작았지만. 부딪히기보다 개인기 위주로 했다. 축구 시작하고 나서 당시에는 경기를 보기가 어려웠다. 슈퍼리그 볼 보이를 하면서 최순호, 박경훈, 이흥실, 이태호가 뛰는 모습을 가까이서 봤다. 최순호 감독님이 머리가 길었는데, 최고의 선수였고, 그 모습을 보면서 꿈을 키웠다.” 

“신흥초에서는 대구시 대회만 나갔지만 반야월초에서는 전국대회 두 번 우승했고, 맹호기 대회에서 우승도 하고 인기상도 받았다. 그때부터 주목받았다. 대륜중고등학교에 갔는데, 중 1,2학년까지는 체격이 작아서 경기를 잘 못 뛰고 후보였다. 중3 때 두각을 나타냈다. 고등학교 가서 1년 정도는 체격이 작아서. 키가 커야 하니까 1년 정도 쉬었다. 감독님이 키만 더 크면 잘할 수 있다고 체력 훈련도 빼주고. 키는 170cm까지 크긴 크더라.” 

“주로 중앙의 처진 스트라이커로 뛰었다. 중앙에서 볼을 가지고 사람 제치는 것에 흥미와 재미를 들였다. 메시보다는 안되겠지만 패스도 해도 되는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제치고, 작지만 순발력이 있으니. 골도 문전에서 순발력이 있으니 좋았던 편이다.”

“대구는 청구고가 제일 잘했다. 대륜고는 한 단계 아래였다. 그 중에도 발전 가능성이 있는 유망주로 기대를 받았다. 대륜고 출신으로 잘 된 선수는 나 뿐이다. 나 외엔 대학교에서 관뒀다.”

“나는 마라도나처럼 땅땅한 체격은 아니고, 마른 체격이다. 그 당시 마라도나가 잘해서 주위에서 나를 마라도나와 비교하기도 했다. 마라도나처럼 가슴 내밀고 뛰는 것이 유행이었고, 흉내를 내기도 했다.”

▲ 1994년 미국월드컵에 참가했던 조진호 ⓒ대한축구협회

◆ 국가대표 조진호, #남북단일팀_공격수 #크라머의_제자 #미국_월드컵 #비쇼베츠와_갈등

“경희대 시절 대학리그에서 1학년 때부터 뛰었다. 우승도 하다가 남대식 감독님이 청소년 대표 소집했을 때 부름을 받았다. 청소년 대표로 시작해서 남북단일팀 나가고, 올림픽, 월드컵을 나갔다. 단일팀 때 아시아 우승을 했다. 나도 어리다는 생각없이 자신감이 있었다. 단일팀에서 수비는 남한 쪽이 많이 했고, 공격은 북한 쪽이 많이 했다. 경기할 때 보니 내 생각이겠지만, 한 골도 세계대회에서 못 넣었다. 어시스트도 했는데, 결정적인 순간 패스가 안 오더라. 최철, 조인철 등이 있었는데 끝나고 나니 주위에서도 공격에 북한 애들이 많아서 골 못 넣은 것 아니냐 했다. 그땐 아니다 싶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결정적인 때 안 줘서 화가 난 것도 있었다. 그건 아니겠죠. 내가 낙하지점을 못찾았겠죠. (웃음)

“혼자 만들어서 슈팅을 했는데 안 들어갔다. 북한 선수들은 굉장히 싸움닭이었다. 훈련 중에도 남북 선수들끼리 티격태격한 적이 있을 정도로 격렬했다. 우리보다 대표 선수까지 하던 선수들이라 수준은 조금 더 높았다.”

“숙소에서 층을 따로 썼다. 친해지려고 방에도 찾아갔다. 북한 이야기도 묻고 했는데 경계를 많이 해서 소통이 잘 안됐다. 밥 먹을 때와 훈련 때만 모였다. 왕래를 막는 편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잠깐 장난 치고, 운동장에서 이야기하다 헤어지고 그런 것이 다였다. 교감이 많지는 않았다. 우리보다 3-4살이 많을 거다. 말도 어른스럽다. 북한에서 해단식 했는데 개성에서 기차 타고 판문점 오면서 배웅했고 울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김정만에게 내가 은목걸이를 줬다.”

“북한 선수들은 대표 하면서도 청소년 대표를 다 했다. 예전에는 '나이롱' 나이다. 북한 같은 경우는 모르니까. 걔가 어느 정도 사상이 자유롭고, 알고 싶어 했다. 대표팀 다니면서 왔다 갔다 하니까. 지금처럼 감독 될 줄 알았는데 사라졌다. 연락도 안되고.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미드필더니까 서로 이야기하면서 친해져서 그 방만 놀러 갔다. 목걸이도 줄 게 이것뿐이라고 하고 다시 만나면 증표라고. 선수가 준 것은 없고 북에서 뱀술을 줘서 집에 아버님께 드렸다.”

“우리가 세계 대회 나가서 좋은 구장에서 뛰니까 영광이었다. 남북 단일팀이 처음 구성되었을 때 통일에 대한 염원도 커서 '성적을 내야 한다. 예선 통과하고 8강, 4강까지 가야 한다'는 마음이 남북 모두 있었다. 예선 통과해서 8강까지 갔다. 포르투갈에 피구와 후이 코스타도 있었고, 우승멤버와 붙어 0-1로 졌다. 유럽 선수들의 수준이 한 단계 높더라.”

“브라질에는 카를로스도 있었다. 1-5로 졌는데, 1-4가 되니까 브라질 선수들이 웃으면서 하더라. 그땐 몰랐는데 카를로스였다. 당시에는 잘 몰랐다. 비디오 분석도 없었고, 상대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감독이 포지션을 정해주고, 나는 골을 넣어서 스타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잘해서 유럽에도 가고, 그런 주위 얘기도 있어서 꿈을 가졌다. 뛰기는 누구보다 많이 뛰었지만 득점을 못해서 불만족스러웠다.”

“다녀오니 자신감과 시야가 달라졌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유럽에서 뛰어보니 몸싸움을 더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더 성숙한 플레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91년 남북단일팀이 끝났을 때 올림픽 예선전은 이미 하고 있었다. 최종 멤버 정하는 상황에 들어갔다. 크라머 감독이 홍콩에 있을 때까지 소집되었고, 독일 전지훈련까지 갔다가 본선에 갈 때는 크라머 감독이 관두시고 김삼락 감독과 김호곤 수석코치 체제로 대회에 갔었다.”

▲ 2014년 겨울, 필자와 대전시티즌 감독으로 인터뷰하던 당시 ⓒ한준 기자


“크라머 감독은 유능한 분이었다. 그 분이 감독을 했으면 내가 경기도 뛰었을 것이다. 나를 좋아했다. 처음에 크라머 감독이 OK해서 뽑힌 것이고, 대회에서 벤치만 지키고 물만 마시고 밥만 축냈다. 크라머 감독은 나이와 관계없이 기회를 많이 줬다. ‘너는 잠재력이 많으니 운동장 나가서 자신있게 하고 패스 위주로 하다가도 위험 지역에서는 돌파를 해라. 나도 작다. 너도 작지만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말을 통역을 통해서 해주며 자신감을 많이 줬다.”

“청소년 선수 출신으로는 그래도 유일하게 올림픽에 갔다. 올림픽 선발은 나이가 어리다 보니 실감이 안 났다. 돌아서 욕심을 냈다. 뛰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좋은 선수가 되거나 꿈을 펼치기보다, 국위 선양보다도 경쟁해서 내가 경기에 뛰자는 눈 앞의 목표에 집중했다. 어려서 이룬 자부심보다 그 마음이 컸다. 부각을 받았지만 기대만 하고 벤치에만 있으니, 경기에 못나가면 심리적으로 슬럼프가 오고, 경기 뛰고 싶다는 생각만 크다가 끝났다.”

“서정원 형은 파워플레이하고 스피드, 성격도 좋았고, 많이 교감하고 챙겨주셨다. 노정윤 선배에게는 거칠면서도 탱크같은 파워풀한 모습을 배웠다. (김)병수 형은 볼을 너무 예쁘게 찼고, (신)태용이 형은 꾀돌이처럼 뛰고. 그래도 형들이 잘하지만 나도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데 왜 안뛰게 해주나 생각을 속으로 했다. 그래도 훈련을 열심히 했다.”

“1993년 호주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에 나갔다. 그때는 내가 주장이고 주축이었다. 최용수와 투톱이었다. 그때는 정말 유럽에도 진출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득점도 하고, 도움도 하고 우리가 8강, 4강만 갔으면 더 부각될 수 있었다. 경기력은 굉장히 좋았는데 3무로 떨어졌다. 박상인 감독이 이끄셨는데, 예선 통과하고 8강만 갔어도 잘 되셨을 것이다. 우승하니까 안부 전화도 주셨다. 최용수, 조진호 너네 둘을 내가 최고로 생각한다며. 주장으로 감독과 교각 역할 했다. 용수와 손발도 잘 맞았다. 청소년 때는 내가 더 위였다.(웃음)”

“그 대회가 사실 한 단계 올라갈 발판을 마련할 기회였는데 아쉽다. 끝나고 호주 팀이 100만불 이적 제안을 한 기억이 난다. 기사 1면에도 나고 그랬는데, 진짠지 가짠지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에이전트들이나 이적이 활발하지 않았다. 경기 후 제시를 한다는 이야기를 건너서만 듣고 직접은 못 들었다. 진행이 안된 것 같다. 대학 소속이니 자연스레 흘러간 것 같다.”

“남북단일팀 때는 내가 주축이 아니고 북한 선수들이 공격 주축이다보니 득점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호주 대회에선 올림픽도 다녀온 경험이 있다 보니 전체적으로 팀을 만들어 가야겠다는 생각과 주장의 책임감이 있었다. 볼이 오면 상대를 기술적으로 제압하겠다는 생각했다. 움직일 때 패스도 많이 왔고, 용수에게도 패스를 많이 줬다. 감독님도 내 위주로 경기를 만들 수 있게 해주셨다. 전체 내용은 좋았다. 3무가 아니라 2승은 할 수 있었다. 터키가 당시 유럽 1위로 올라왔다. 선제골 넣고 모든 경기를 비겼다. 미국과도 2-2로 비겼다. 앞서가다가 비겼다. 잉글랜드도 이기다가 비겼다. 항상 마지막에 다 먹었다.”

“미국전에서 2-1이 되었을 때 한 골 더 넣을 기회가 있었는데 놓쳤던 것이 아쉽다. 1승 2무라도 해도 올라가는 데 감독님께 죄송했다. 우리가 골 넣을 기회가 많았는데 내게도 기회가 많았고 용수에게도 많았는데 용수도 못 넣었다. (웃음) 득점을 더 했으면 쉽게 이겼을 것이다. 터키나 잉글랜드 모두 해볼만 했다. 8강 갔다면 분위기 타서 4강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올림픽에서도 선전했고, 사실 협회는 호주 대회에서는 8강 이상 들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다. 크라머 감독도 데려와서 축구 수준을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던 시점이었다. 선수들이 자신감을 갖고, 내용도 좋고 현지 에이전트도 우리 선수를 본다는 정보도 있었다. 그 당시에 지금처럼 에이전트가 활성화되었으면 유럽 진출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노정윤 선수가 일본에 간 게 처음이고, 황선홍, 하석주 등이 줄줄이 나간 것이 1994년 이후였다. 그 전에는 외국 나가서 연결해주는 시도 자체가 없었다. 지금 같았으면 내 나이였다면 어린 나이에 부각되서 나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국가 대표에 뽑히니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로 알아보는 이들이 많았다. 사인 요청도 많았다. 1994년 미국월드컵은 나중에 가게 됐다. 30명 모여서 평가전하던 시기에 5차례 평가전에서 3골 2도움을 했다. 황선홍 선수보다 많이 넣었다. 나는 예선을 안 뛰었고 호주 대회 잘해서 협회 제안에 점검받게 되었고, 김호 감독의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했다. 김현석은 예선전에서 굉장히 잘했는데, 나로 인해 떨어졌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많았다. 역대 최고 멤버로 불리던 팀에 선발이 됐다.”

“평가전을 잘해서 내 힘으로 국민들에게 보여줬다. 잠실에서 열린 카메룬전에 들어가서 아주 잘했고, 계속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에는 때리면 그냥 들어갔다. 따로 개인 운동을 많이 했다. 타워 호텔에 묵을 때도 아래에 맨땅 운동장이 있는 데, 거기서 따로 운동을 많이 했다. 태릉이나 서울올림픽경기장이 사계절 잔디가 아니어서 기회가 되는 대로 운동을 했다. 월드컵에 대해 마음이 커서 엄청 기대하고 준비했다.”

▲ 1993년 호주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출전했을 때. 아래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조진호 ⓒ대한축구협회

“그 당시 아내도 만났다. 대학 시절에 지금 결혼한 아내와 처음 연애를 했다. 축구 선수로 뭔가 보여주고 싶어서 더 열심히 운동을 했다.”

“미국월드컵 당시 볼리비아전에서 비기고 나를 뛰게 하라는 기사를 팩스로 봤다. 나는 볼리비아전에 몸이 굉장히 좋았다. 규정상 몸을 3명만 풀 수 있었다. 스페인전부터도 조커로 들어가겠지 기대했고, 볼리비아전도 기대했다. 볼리이바전에 정말 몸이 좋았는데 들어갔다면 골을 넣었을 것이다. 독일은 안뛴지 너무 오래 돼서 감각도 떨어졌고 상대에도 좋은 선수가 워낙 많았다. 선발로 나가서 독일 선수들 보는데 하체가 내 키만 하더라. 마테우스, 클린스만, 일크너 등 세계적인 스타들을 그때는 다 알고 있었다. 날씨도 댈러스에서 40-50도 됐다. 스페인전하고 볼리비아전에 몸이 굉장히 좋아서 나갔다면 역사에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웃음) 독일전에 애국가 부를 때 부담감이 컸다. 세계적인 팀과 붙어 성과를 내야 한다는 마음, 8만이나 되는 관중 속에서 딸려도 한 번 해보자.”

“몸은 좋았다. 결정적 기회도 한번 있었다. 판근이 형이 정확하게 줬다. 선홍이 형이 옆으로 가서 밀어줄까 갈까 고민하다가 내가 때리겠다. 몇 초 동안 엄청 고민했다. 찍을까, 감을까, 때렸는데 약간 인사이드에 맞았다. 한번 더 치고 가도 됐는데. 맞는 순간 노골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경기 감각이 없다가 뛰니까 그런 면에서 부족했다. 훈련 중 몸이 좋았지만 경험있는 선수를 감독이 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형들을 이길 수 있다. 실력으로 경쟁하겠다. 어리지만 뽑혔으니 운동장 밟겠다는 의욕을 가졌다.”

“그 이후 대표팀 감독이 비쇼베츠였다. 기술자문위원으로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참가했고, 올림픽 감독을 하면서 아시안게임 감독을 했다. 히로시마에 월드컵 멤버 중심으로 갔다. 나한테 기회가 많았다. 그 당시 선홍이 형이 아주 잘했다. 원톱으로 서서 골도 많이 넣었다. 그때 조커로 계속 뛰었다. 일단 그 대회는 경기 출전보다 병역 혜택만 생각했다. 4강에서 우즈베키스탄에 슈팅을 30번 정도 했는데 막판에 하프라인에서 때린 것 먹어서 울고 불고 난리났다. 그땐 내가 뛰기보다 팀 성적을 중시했고, 월드컵 이후 자만심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

“비쇼베츠 감독이 유럽 스타일로 큰 선수를 많이 썼다. 내게 예선전까지 주장을 줬는데 월드컵까지 갔다 왔는데, 자만심이 있는 상황에서 주장인데도 경기를 꾸준히 안 내보내더라. 평가전이니 이렇게 하는 거라 하셨는데 열심히 해도 경기를 안 뛰게 해주더라. 비쇼베츠 감독이 큰 사람을 선호하고 포스트 플레이 하다 보니 (나는) 중간에서 이도 저도 아니었다. 중간 역할 잘하라고 해서 희생하면서 하겠다고 했는데 서로가 이 상황을 못 견딘 것 같다. 나를 중심으로 삼아주지 않으니 못 뛰겠다고 면담을 했다. 경기 못 뛰느니 충족될 때까지 소속팀 가서 하는 것이 낫지 않냐고 못하겠다고 했다. 비쇼베츠 감독은 붙잡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선수를 가르쳐 보니 그 당시에는 내가 너무 경솔했다. 스폰지처럼 흡수해야 했는데, 감독이 날 인정해주는 상황인데, 어린 나이에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쉽게 말한 것 같다. 선수들에게 지도자에게 먼저 반기를 들면 자기 손해니 참으라고 얘기를 해준다. 그 경험을 해서 6개월 자격 정지도 먹고, 협회에선 파장이 있고, 기자에게도 말하니 선수 생명이 끝날 뻔 하기도 했다. 협회와 서로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상황에서 보도가 나가니까 문제가 커졌다.”

▲ ⓒ포항스틸러스


◆ 프로 선수 조진호, #포항스틸러스 #결혼 #부상불운 #30세_조기은퇴

“포항에선 허정무 감독님이 (나를) 좋아했다. 소속팀에서만 (경기를) 할 수 있고. 많이 재기를 시켜줬다. 소속팀 가서 활약을 많이 했다. 아픔이 있고 온 상태에서 잘 해주셨다. 그러다가 무릎을 다쳤다. 골 넣고 잘하다가. 무릎 다치고 나서 ‘올스타도 뽑아주려고 했는데…’ 하시면서. 내측 인대가 끊어졌다. 수술을 안하고 재활 반복하다가 그해에 완전히 1년을 보냈다. 원래 내측은 수술 없이 재활을 한다. 나았다가 조바심 때문에 또 다치고, 4-5월에 다치고 포항에서 챔피언결정전도 못 뛰었다. 라데, 황선홍 등 최고 멤버였는데. 그걸 못 뛰었다.” 

“비쇼베츠 감독도 신문 기사는 기사고 포항에서 잘하고 몸이 좋으면 다시 뽑겠다고 했다. 홍콩 구정 대회 나갈 때 면담을 했다. 포항으로 가야 하는지 결정해 달라고 했다. 기회를 준다고 했는데 연장전 10분 남기고 투입하고 그랬다. 경기를 못 뛰면 포항 가서 끌어올리는 게 낫지 않냐. 가기 전 첫 경기부터 안 뛰다가 마지막 경기 연장전에 뛰었다. 약속을 안 지켜서 그렇게 된 거다. 홍콩에서 파장이 있었다. 취재 온 기자가 왜 안 뛰냐 물어보니 그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소속팀 가는 게 맞지 않나 얘기를 했다. 협의를 했는데 비쇼베츠 감독과….”

“교훈을 느낀 것은 누구든 감독에게는 그래선 안 된다. 우리 선수들에게도 감독과 기자에게 대하는 것 조심하라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무릎 부상이 컸다. 당하고 나서 제대로 못하고, 경기 위주로 하다 보니,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하니까. 드리블하면서 꺾는데 잘 안되더라. 심리적으로도 또 다칠까봐 (주저)하고. 훈련하다가도 자주 다쳤다. 작게 작게 다치는 것이 반복이었다. 지금 같았다면 재활이 좋은데 당시에는 안 좋았다. 지금 선수들에게도 부상을 절대 숨기지 말라고 해준다.”

“힘든 시기에 결혼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포항에서 3년 뛰고 상무에 갔다. 상무가 요즘처럼 리그 에 나오는 게 아니고 아마추어 대회에 나갔다. 시합이 있으면 한 달 전에 훈련하고, 또 3개월 경기 안 하다가 대회 나가고. 감각도 떨어지고 동기부여도 안됐다. 고질적 부상이 되어서 군대 다녀오고 포항, 부천, 성남에 갔다가 은퇴했다. 첫 부상이 면제와 관계없는 내측 인대를 다쳐서 재수도 없었다.”

“제대 후 4년 차 때 2002년에 경기 시작 3분 만에 혼자 뛰다가 십자 인대가 끊어졌다. 재기하고 싶었는데 수술해 보니 나이가 30세 정도였고, 의사가 2년은 재활해야 한다고 했는데 부천에서 코치 제안이 와서 다시 하는 게 무리다. 그래서 2002년 3월에 은퇴했다. 그때 스트레스가 엄청 많았다. 2002 월드컵이라. 유상철, 명보 형, 이운재, 황선홍 선배, 용수 등 뛰는 것을 보니…. 안 다치고 그랬으면 나도 우리나라에서 하는 월드컵에 뛰었을 텐데….” 

◆ 지도자 조진호, #2군리그_우승 #구자철_발굴 #대전_챌린지신화 

“부천SK가 제주 유나이티드가 됐다. 거기에 있으면서 이제 지도자니까, 선수 때와 달라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 참는 것을 배웠다. 인내를 많이 했다. 성격적으로 나는 성취를 해야 하고 승부욕이 강했는데, 코치는 그러면 안 된다. 여러 감독님의 장단점을 많이 보고, 내가 하면 어떻게 접목할까를 생각하고 메모하고. (감독을 할) 기회가 되면, 기회가 오면 써먹으려고 했다. 지금까지 코치 생활하면서 (감독을) 준비했다. 제주에 8년, 전남에 2년, 대전에 1년 하고. 대전에서 1년만에 대행하고, 감독이 됐다. 감독이 되면서 두렵지 않았다. 코치를 오래 하면서 현장에서 많이 지켜봤다.”

“제주는 지원이 지금은 되지만, 좋을 때와 나쁠 때 (지원) 차이가 컸다. 2003년에는 지원이 크지 않았다. 선수들도 자원이 좋지 않아서 지는 경기를 많이 봤다. 졌을 때 좌절하는 것, 자꾸 지는 경기 보면 이길 수 없다는 마음이 생겨. 그 현장에 있으면서 어떻게 할까를 고민했다. 직접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관찰하면서 시뮬레이션도 해보고.”

“2군을 맡으면, 2군 선수들은 불만도 많다. 2군리그는 동기부여가 없다. 제주에서 5년간 2군을 이끌었다. 2군은 운동량도 많다. 하루 4회 하기도 하고 저녁에 웨이트도 시켜서 시간이 없고 힘들었다. 2군리그 치를 때 1군에서 안 뛰는 선수를 데려오고 선수도 많이 바뀌고. 그러다 2군 리그도 우승했다. 10명 가지고도 경기 해봤다. 다리에 쥐가 나도 못 바꾸니 이 선수를 다른 위치에 쓰는 식의 임시방편도 배웠고. 이번에도 막판에 선수가 빠져도 걱정 안 했다. 바꿔서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나한테 경험이 없다고 하는 것은 실수하는 것이다. 나도 코치를 오래 했고, 감독 경험이 부각은 안됐지만 쌓였다. 2군에서 연습생 신화도 만들었다. 제주의 이상호, 구자철 등 가능성있는 선수들을 1군으로 올렸다. (구)자철이는 처음 와서 힘도 없고, 2군에서 많이 뛰었다. 2군 감독은 코치다. 1군도 함께 하고. 왔다 갔다 한다. 잠잘 틈도 없었다. 자철이에게 한마디했다. 기성용이 잘나갈 때인데, 자철이 네가 기성용보다 한 단계 올라서려면 뒤에서 미드필드 플레이를 하지 말고 앞으로 파고들어라. 뒤에 볼이 없을 때 전방으로 치고 올라가서 공격적으로 하라. 그 이후부터 다른 분들도 좋은 조언했겠지만, 나도 지시했다.(웃음) 2군하다가 1군 올라가고 청소년 대표했다. 결국 해내더라.” 

“지금도 선수를 보다가 이 선수가 이 자리에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계속 관찰한다. 송주한도 마찬가지고 유성기, 찬희도 중앙 수비를 시켜봤다. 연습 경기에서. 찬희는 중앙 수비는 안되더라. 중앙 수비 서다가 마드필더를 시키면 잘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로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주한이도 왼발만 쓰는데 창우가 나갔을 때 오른쪽 써봤고, 지금은 다 본다. 원석이도 어느 때는 미드필더로 세웠다. 임영규 같은 경우 중앙 수비도 하고 스트라이커도 하고, 김종국은 사이드랑 가운데 다 보고. 한섭이도 윙으로 바꿔서 잘하고 있고. 어느 자리든 처음은 헷갈릴 수 있는데 믿으라고 했다. 불만 갖지 말고 믿고 하면 그 자리에서 더 흥미를 가질 수 있다. 즐겁게 더 할 수 있다.”

“훈련 때는 패턴 훈련을 많이 한다. 서로간 경합이 강하면 부상이 많이 나온다. 패턴 훈련을 하면 선수들이 경기의 길을 알게 한다. 수비부터 잡아서 패스 연결, 한쪽은 강하게 안하고 움직이게. 베스트11과 나머지 나눠서. 그렇게 가다가 포지션을 몇 가지 바꿔서 다른 역할을 해놓고 머리 속에 그 역할을 집어넣게 해둔다. 그렇게 부상도 피하고. 볼 오기 전에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수비가 빠르게 붙는다고 하고. 템포는 실제보다 느리지만 길을 알고 움직이게 패턴을 익혀준다. 그게 철학이다. 그거 외엔 많이 안 한다.” 

“코어 트레이닝, 웨이트는 기본으로 하지만 나머지는 계속 공을 가지고 패턴 훈련한다. 침투하고 공 잡는 것, 무조건 공격적으로 공을 잡아놓는다. 수비 쪽으로 잡으면 바로 바로 지적한다. 반대로 잡으면 백패스밖에 할 수 없다. 바이에른 뮌헨을 보면 절대 뒤로 안 잡는다. 세계적인 팀은 다 그렇다. 나는 유학을 못 가서 배우는 게 한계가 있다. 그래서 빅 리그 경기를 많이 본다. 그걸 편집해서 선수들에게 보여준다.”

“무조건 잘하는 팀,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첼시, 리버풀, 맨시티, 챔피언스리그나 큰 경기는 영상 편집하고, 대표팀 경기의 좋은 장면. 우리 선수들보다 클래스 높은 선수들, 흥미있는 경기를 보여준다. 나도 보면서 공부하고. 현장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데 못 본 것이 아쉽다. 그래서 서울, 수원, 전북, 포항 등 경기를 시간 있을 때마다 혼자 가서 많이 봤다. 표 사서 볼 때도 있었다. ‘출입증’을 잃어버려서. (웃음) 명함 주고 받아서 보기도 했다. 토요일 경기를 하면 일요일에 쉬니까 가서 보는 편이다. 보고 느끼고. 시즌 중에도 어느 정도 클래식에 간다는 목표가 섰고, 이기고 난 뒤 편하게 봤다. 경기가 안되면 못 봤을 것이다. 우리 팀이 더 중요하니까.”

“우리 비디오 미팅도 단점은 안 보여준다. 경기 전에 좋은 것만 보여주고. 지금까지 다섯 번만 단점 보여줬다. 계속 좋은 것만 반복적으로 보고, 자신감을 갖게, 할 수 있다. 지적도 좋은 것을 보여주면서 한다. 좋은 것을 보여주면서, 어제 경기한 것을 3일 후에 좋은 것 보여주며 안좋은 것에 대한 상황을 아니까, 그 얘기를 해준다. 반복적으로. 훈련도 반복적으로.”

“선수와 지도자의 신뢰는 결국 결과다. 좋은 얘기, 잘해주고, 밥 사주고, 프로그램 좋아도 결과가 나와야 선수들이 믿음을 준다.” 

“감독이 대행이면, 선수들이 안정을 못 찾는다. 감독이 언제 나갈지 모른다. 성적이 나쁘면 나가고, 좋아도 나갈 수 있다. 그렇게 출발했을 때, (2013시즌) 대행이라도 경남전 끝나고 강등이 확정됐을 때 잠을 못 잤다. 선수들이 우는 것 보고. 한 번 비기고, 한 번도 안 지고 마쳤다. 그래도 내가 책임이 있고, 강등 못 막은 것이다. 내가 대행이든 감독이든 맡아서 해보겠다고 했고, 구단에서 흔쾌히 들어줬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대전 시절) 경기에 항상 19명 데려간다. 긴장감을 주기 위해. 18명 엔트리는 경기 1-2시간 전에 결정한다. 2군에서 열심히 하는 선수를 19번째로 넣어서 현장감을 키워준다. 운동하고 다음 경기 준비해라. 자기도 가능성 있는 것을 인지하고. 그 한 명을 고르는 것은 정말 고민을 많이 한다. 19명을 시즌 내내 계속 운영했다. 원정에도 항상 19명을 데려갔다. 혹시 감기나 집중력 문제 나오면 바꿀 수 있게. 호텔에서 자고 원정 경험하는 것도 쌓고.”

“아드리아노는 생각이 색다르다. 지금은 우리 말을 잘 듣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팀에 옮기면 적응이 필요할 거다. 실력은 성공할 자질인데, 다른 쪽도 중요하다. (아드리아노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면 한다. 프로다. 쉴 때도 웨이트한다. 훈련은 별로 안 좋아한다. 체력 훈련 할 때만 꼭 시킨다. 토요일 경기하면 이틀 쉬고, 화요일 체력 훈련하고, 경기 전 이틀은 중요한 훈련하니까. 세 번만 시키고. 대신 경기장에서 열심히 해야 한다고 얘기해주고 쉴 때 쉬게 해줬다.”

“난 식사를 일찍 하는 것을 싫어한다. 아침 식사를 9시나 9시반, 10시에 먹는다. 내가 선수 때도 아침에 일어나기 싫었다. 8시에 밥 먹자고 하면 요즘 선수들이 인터넷, 컴퓨터 다하는데 밤 10시, 11시에 안 잔다. 규정은 11시지만 12시 전에 자라고 한다. 8시에 아침인 것이랑 9시반 10시는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다. 오후 2시 경기면 한 끼만 먹는다. 자는 게 더 편하니까. 마음의 여유를 주고 푹 자고. 잠이 안 오는 경우도 있고, 늦게 자기도 하고. 7-8시간은 자야 한다. 배고픈 선수도 있지만 내 스타일이다. 적응하라고 했고, 이제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선수들이 많이 자야 경기를 잘한다. 두 시 경기 그렇게 하고 저녁 7시 경기라도 아침 늦게 먹고 두 끼만 먹는다. 점심, 석식 이렇게 먹고.” 

“지도자도 밥 먹을 때마다 만나면 답답하다. 밥 먹는 시간에 나는 거의 안 나타난다. 한끼만 먹고 집에 가거나, 밖에서 먹고 애들이 다 먹은 뒤 혼자 먹고. 자기들이 농담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내가 보고 있으면 편하게 못 먹는다. 식사 자리에 편하게 먹도록. 코치와 감독은 다르다. 코치는 같이 먹지만 난 편하게 해주려고 한다. 경기에 지면 오히려 쉬는 시간을 더 준다. 선수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킨다. 난 억압적으로 하는 지도자를 많이 봐서 눈치 많이 봤다. 공 차고, 벤치 보고. 공 차고, 벤치 보고. 난 나와 눈 마주치지 말라고 한다. 쉬는 중에도. 습관적으로 그러는 선수들이 있다. 요즘도 강압적인 지도자 많다. 나는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계속 칭찬을 한다. 경기 하루 전에는 절대 자극적인 얘기를 안 한다. 무조건 잘할 수 있다고 해준다. (서)명원이도 19세 대표팀에 다녀오고 슬럼프가 있었는데 골 넣을 수 있다고 얘기해주고 내가 시범도 보였다. 내년에 더 잘할 것이다. 마음이 깃털처럼 편하니까 변화가 보였다.”

“난 경험이 없다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 그렇게 말하면 선수들이 정말로 못한다. 나도 안 한다. 나 역시 감독 경험이 없지만 현장 경험을 했다. 우리가 이기려면, 상대보다 간절하게 많이 뛰어야 한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글=한준(스포티비뉴스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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