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개회식에 입장하는 한국 선수단. 전통의 효자 종목인 역도는 이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한국은 이듬해인 1966년 12월 9일부터 20일까지 방콕에서 벌어진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주최국 태국을 간발의 차이로 따돌리고 대회 출전 사상 처음으로 일본에 이어 종합 순위 2위에 올랐다. 역도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가운데 82.5kg급 이종섭과 90kg급 이형우가 금메달을 손에 쥔 것을 비롯해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를 보탰다. 기대를 모았던 원신희는 성인 무대의 벽을 실감하며 이란의 파비즈 잘라예르(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 은메달)와 일본의 기무라 다케오에게 밀려 동메달을 차지했다. 이 대회 역도에서 이란은 금메달 3개와 동메달 4개로 아시아의 역도 강국 자리를 탄탄히 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도 한국은 금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복싱 지용주 은메달과 장규철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역도는 애초 원신희에게 동메달 정도를 예상했으나 노메달에 그쳤다. 이란과 일본은 각각 금메달 1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 그리고 금메달 1개와 은메달 1개로 역도 종목 순위 2, 3위에 올라 아시아 역도의 실력을 자랑했다. <6편에서 계속>

서울이 유치했다가 개최권을 반납해 방콕이 1966년 대회에 이어 다시 주최한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 역도 종목에서는 중량급 선수들이 기세를 올렸다. 90kg급 윤석원은 합계 450kg으로, 110kg급 김대주는 합계 430kg으로 금메달을 들어 올렸다. 67.5kgrmq 원신희는 은메달, 56kg급 최문재와 75kg급 이춘식 그리고 82.5kg급 박문수는 동메달을 보탰다. 이 대회에서는 일본이 8체급 가운데 절반인 4체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는 강세를 보였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체육회는 멕시코시티 대회에 이어 다시 한번 6위 이내 입상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종목 및 선수 위주로 소수 정예 선수단을 꾸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1차적으로 확정된 선수단은 역도와 여자 배구, 복싱, 레슬링, 유도 등 5개 종목에 39명(임원 13명, 선수 26명)이었다. 이는 1952년 헬싱키 대회 때보다 4명이나 적은 역대 최소 규모였다. 그러나 7월 프랑스에서 벌어진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자유중국(대만)과 북한을 세트스코어 3-0, 3-1로 꺾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은 남자 배구(임원 2명, 선수 12명)가 합류한 데 이어 서독 현지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던 육상의 박상수(남자 높이뛰기)와 백옥자(여자 포환던지기) 그리고 수영의 조오련과 사격 대표팀(임원 1명, 선수 5명)이 추가되면서 62명(임원 6명, 선수 46명)으로 선수단 규모가 늘었다.

소수 정예 선수단에 들어간 역도는 67.5kg급 원신희 혼자 출전해 합계 427.5kg으로 7위에 모물렀다. 동메달리스트인 폴란드의 비그뉴 카즈마레크와는 10kg 차이가 났다. 이 대회에서 아시아 나라 가운데는 이란과 레바논이 은메달을 1개씩 획득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주니어 시절 역도 관계자들의 기대를 모았던 원신희가 제 몫을 했다. 67.5kg급 원신희는 인상 130kg과 용상 165kg, 합계 295kg으로 3관왕에 오르며 한국의 메달 레이스에 큰 힘이 됐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아시안게임에 데뷔한 북한과 치열한 레이스를 펼쳤는데 역도가 세부 종목별로 메달을 시상하는 방식을 채택한 데 힘입어 북한을 금메달 숫자 16-15로 따돌리고 종합 순위 4위에 올랐다.

원신희 외에 110kg급 윤석원이 용상과 합계에서 은메달을 땄고 당시 현역 국회의원이었던 황호동은 110kg 이상급 인상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강세 종목인 역도에서 메달 숫자를 늘린 이란은 역도에서만 금메달 10개와 은메달 11개 동메달 3개를 쓸어 모아 금메달 36개와 은메달 28개, 동메달 17개로 처음 아시아경기대회에 나온 중국(금 33 은 46 동 17)을 따돌리고 일본(금 75 은 49 동 51)에 이어 종합 순위 2위에 올랐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체육회는 과거 올림픽에서 입상한 전적이 있거나 입상 전망이 확실해 국위 선양이 기대되는 종목 그리고 지역 예선을 통과한 종목 등 소수 정예로 강훈련을 실시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구성된 선수단은 임원 22명과 선수 50명으로 뮌헨 대회를 약간 웃도는 규모였다. 출전 종목은 레슬링과 유도, 남녀 배구, 복싱, 사격이었다.

전통의 효자 종목 역도가 올림픽 선수단에서 제외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 대회 역도 종목에서 소련은 9체급 가운데 7개 체급 금메달을 휩쓰는 초강세를 보였다. 아시아 나라 가운데에는 일본과 이란이 동메달 2개와 1개를 각각 챙겼다.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전해인 1977년 제58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한국 신기록 5개를 세우며 두각을 나타낸 안지영이 90kg급에서 합계 320kg으로 한국 선수단에 대회 첫 금메달을 안겼다. 56kg급 이명수는 은메달을 보탰다. 이란이 출전하지 않은 이 대회 역도 종목에서는 북한(금 3 은 2 동 3)이 일본(금 3 은 1 동 2)과 맞서는 선전을 펼쳤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역도는 다른 종목들과 마찬가지로 출전 기회를 갖지 못했다. <8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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