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도쿄(일본), 글 조형애·영상 배정호 기자] 조연으로 살고 있다. 축구 기자에게 주인공은 거의 대부분 선수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선수들과 관중들까지 모두 빠져나간 자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 일상이다. 일본 출장 4일째, 경기는 오후 9시 30분쯤 끝났다. 그럼 이제 '조연의 연장전'이 시작된다. 지금은 오후 11시 43분. 이곳은 쭈욱, 여전히, 아직도 2017 동아시안컵(EAFF E-1 풋볼 챔피언십)이 열리는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이다.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날이면 생각에 잠긴다. 나대기 싫어 선택한 부끄럼쟁이의 사회생활. 축구를 좋아한 죄는 대가를 치른다. 배가 고프다. 이럴 땐 또 다른 조연들에게 연민 또는 관심이 생기는 게 당연지사. 그래서 9일 르포 주인공은 관중석에서 찾았다.

북한 응원단은 보고 또 봐도 새롭다. 눈이 자꾸 머문다. 주인공들이 분주하게 뛰고 있는데, 그들이 궁금해졌다. 일본과 북한 경기. 1,000여 명 북한 응원단 속으로 들어갔다.

분명 일본어다. "아부나이!(위험해!)", "요시 요시(좋아 좋아)". 일본에서 쭉 살아온 재일 동포 학생들. 자기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일본어로 북한, 아니 조선을 응원하고 있었다. 선택은 "아부나이!"를 가장 크게 외쳤던 여학생들. 그들을 잡고 물었다. "인터뷰할 수 있어요?"

▲ 가장 열정적이었던 두 사람. 알고 보니 리영직과 잘 아는 사이? ⓒ스포티비뉴스

응원단은 도쿄 내 재일 조선인 초등학생부터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재일조선인총연합회 그러니까 조총련 학생들과 재일 동포들로 구성돼 있었다. 학생들은 각자 학교에서 '고향 팀 온단다'는 말에 모인 게 광활한 아지노모토 스타디움 한 켠을 붉게 물들였다. 본인들도 얼마나 온지는 정확히 모른단다.

한국 응원단은 물론 중국 응원단보다도 훨씬 많았다. 이건 비교할 의미가 없다. 북한 응원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사분란했지만 연습은 따로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응원 막대를 경기 입장하면서 받고 좌석에 모여 호흡을 맞춘게 그 정도였다. "필승 조선!". 반대편에서도 또렷하게 들리는 말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흔들리는 붉은 막대 풍선. 다시 물었지만 답은 같았다. "연습 안했어요~"

좋아하는 선수를 묻자 단번에 선수들 이름을 줄줄 외웠다. 리영직(26·카마타마레 사누키), 김성기(29·마치다 젤비아), 안병준(27·로아소 구마모토). 리영직은 조선인 학교를 같이 다닌 '오빠'라기에 영상 편지도 부탁했다.

"영직이 오빠,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친하게 지냈는데 이렇게 큰 무대에 서고 축하하고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파이팅!"

▲ 인터뷰를 자청한 꼬마 인터뷰이들. 노래도 불러 줬다. ⓒ스포티비뉴스

응원가는 꼬마들 몫. 부끄러워하는 여학생들을 뒤로하고 어린이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가리라 백두산으로', '만리마'. 조선인이라면 으레 학교에서 배운다는 두 노래를 목청 높여 불렀다.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안영학(39). 어림잡아 30살은 차이가 날 선수를 향해 "우리 동포입니다!"라고 했다.

어쩜 시간이 갈수록 힘이 샘솟는 듯했다. 그라운드 내 선수들은 미친 듯이 뛰었고 응원단은 거기에 힘을 보탰다. 거의 북한은 이길 뻔했다. 90분 내내 이어진 '전투 축구'. 후반 추가 시간 터진 '극장 골'로 이기긴 했지만 일본은 밝게 웃을 수 없었다.

응원단은 그 분위기에 한 몫을 했다. 진 팀에서 더 큰 박수가 쏟아졌다. 다시 스코어를 확인해보니, 북한이 진 게 맞긴 맞다. 0-1 패.

때론 조연도 박수를 받긴 한다. 그들에게 고마워하는 주인공들도 있다. 하지만 세상사 조연에도층이 있는 법. 관중석엔 미소를 믹스트 존(공동 취재 구역)에선 굳은 표정을 보인 선수단이다. 인터뷰는 거의 모두가 거부. "다음에 합시다". 이날 믹스트 존에서 들은 가장 긴 말이었다. 오매불망 기다려 퇴짜 맞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 다시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시간은 흘렀고 기삿거리는 못 챙겼다. 보통 이럴 땐 일은 했으나 어째 찜찜한 기운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주인공 아닌 조연의 삶. 응달진 곳에 볕들 날을 기다린다(믹스트 존이라도 보다 머물러 달라고). 지금은 그 대신 새벽이 밝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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