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이경(맨 앞)은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2개 대회 연속 2관왕의 대기록을 세웠다. ⓒ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동·하계 올림픽을 같은 해에 치르지 않는다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결정에 따라 하계 대회와 엇갈려 치르는 첫 대회인 1994년 제17회 동계 올림픽은 2월 12일부터 27일까지 북유럽 노르웨이의 자그마한 시골 도시 릴레함메르에서 펼쳐졌다.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평창은 2011년 7월 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제123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뮌헨(독일)과 안시(프랑스)를 1차 투표에서 가볍게 제치고 대회 유치에 성공했다. 삼수 끝에 거둔 성과였다. 이제는 대회를 잘 치르고 대회 이후 경기장 시설 등을 활용해 성공한 올림픽으로 남기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동·하계 올림픽과 축구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굵직한 스포츠 이벤트가 지난 30년 사이 한반도 남쪽에서 펼쳐진다. 중·장년 스포츠 팬들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이다. 한국 겨울철 스포츠는 그동안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겨울철 올림픽 출전사로 알아본다. <편집자 주>

수도 오슬로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인구 2만3,000여명의 소도시 릴레함메르는 일년 내내 눈이 내리는 데다 영하 20도의 강추위에도 바람이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도시에서 치러진 동계 올림픽인 만큼 적설량 부족이나 이상 기온과 같은 돌발 변수 없이 역대 대회 가운데 최상의 기상 조건에서 모든 경기 일정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2년 전 알베르빌 대회에서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의 선전으로 동계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메달(금 2, 은 1, 동 1)을 획득하는 기쁨을 누렸던 한국은 이 대회에서도 한층 강해진 쇼트트랙 전력을 앞세워 금메달 4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로 종합 순위 6위를 차지했다.

알베르빌 대회에서 쇼트트랙 외에 스피드스케이팅 김윤만이 은메달을 따는 성과를 올렸던 것과는 달리 이 대회에서는 6개 메달 전부를 쇼트트랙 한 종목에서만 거둬들였다. 그러나 동계올림픽 개최 경험이 있는 캐나다와 스위스, 오스트리아, 일본 등 세계적인 동계 스포츠 강국들을 7위권 밖으로 밀어내고 알베르빌 대회 10위보다 4계단이나 도약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나이 어린 김윤미의 활약상이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1980년 12월 1일생으로 대회 당시 13살이었던 정신여중 1학년 김윤미는 전이경, 김소희, 원혜경 등 선배들과 함께 쇼트트랙 3,000m 릴레이에 출전해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김윤미는 동, 하계 대회를 망라한 역대 올림픽 최연소 금메달리스트다.

쇼트트랙은 여자 3,000m 릴레이 외에 여자 1,000m에서 전이경, 남자 500m에서 채지훈, 남자 1,000m에서 김기훈이 각각 금메달을 따냈다. 김기훈은 시범 종목으로 치러진 1988년 캘거리 대회를 포함해 3회 연속 금메달의 금자탑을 세웠고 전이경은 2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전이경은 이 대회 2관왕에 이어 1998년 나가노 대회에서도 같은 종목의 2관왕에 올라 한국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2연속 2관왕의 기록과 함께 올림픽 금메달 4개 보유자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다.

500m 금메달리스트 채지훈은 1,000m에서 김기훈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했고 여자 3,000m 릴레이 금메달리스트 김소희는 1,000m에서 전이경과 램버트 나탈리(캐나다)에 이어 동메달을 추가했다.

쇼트트랙 외에 유선희가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39초92로 5위로 골인해 알베르빌 대회 9위에서 4계단 올라섰을 뿐 남자 스피드스케이팅과 스키, 바이애슬론 등에서는 하위권의 부진을 보였다.

이 대회에서는 러시아(금 11 은 8 동 4)가 6년 만에 종합 순위 1위를 되찾았고 개최국 노르웨이(금 10 은 11 동 5)가 2위, 독일(금 9 은 7 동 8)이 3위를 차지했다.

‘일본의 알프스’로 불리는 나가노에서 1998년 2월 7일부터 22일까지 제18회 동계 올림픽이 열렸다. 대회에는 72개국에서 2.176명의 선수가 참가해 23개 종목에 걸린 69개의 금메달을 놓고 15일 동안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한국은 그때 기준 동계 올림픽 출전 사상 최다인 63명(선수 38, 임원 25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23개 종목 가운데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 피겨스케이팅, 크로스컨트리, 루지(싱글), 스키점프, 바이애슬론, 알파인 대회전, 회전 등 9개 종목에 출전해 쇼트트랙에서만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따 종합 순위 9위에 올랐다.

1992년 알베르빌 대회 10위(금 2, 은 1, 동 1)와 1994년 릴레함메르 대회 6위(금 4, 은 1, 동 1)에 이어 3회 연속 세계 톱 10에 들었다.

대회 첫 메달은 한국 선수단의 속을 태우고 태운 끝에 개막 10일 만에 쇼트트랙에서 나왔다. 2월 17일 나가노 시내 화이트 링 경기장에서 벌어진 쇼트트랙 남자 1,000m에 출전한, 당시 18살의 고교 2년생 김동성은 결승에서 중국의 리지아준과 예측을 불허하는 선두 다툼을 벌이다 골인 지점 바로 앞에서 오른발을 쭉 내밀어 0.053초 차이로 리지아준을 제쳤다. 김동성은 1분32초375, 리지아준은 1분32초428의 접전이었다.

남자 1,000m에 이어 곧바로 벌어진 여자 3,000m 릴레이 결승은 평균 나이 19살인 한국 선수들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전이경, 최민경, 원혜경, 김윤미로 이어지는 세계 톱 랭커 4명이 포진한 한국에 양양 A만이 랭킹 5위에 올라 있는 중국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국은 막판 스퍼트를 의식하며 스피드를 조절하다가 4번 최종 주자인 김윤미가 2바퀴를 남긴 지점부터 번개 같은 스퍼트로 4분16초260으로 골인해 중국을 0.123초 차로 앞섰다.

금메달 레이스의 대미를 장식한 선수는 전이경이었다. 여자 3,000m 릴레이에서 우승한 지 나흘 만인 21일 1,000m에 출전한 전이경은 후배 원혜경과 중국의 양양 A, 양양 B 등 3명의 선수와 함께 스타트라인에 섰다. 9바퀴 레이스 가운데 5바퀴를 돌았을 때 순위는 양양 A, 원혜경, 전이경 그리고 양양 B였다. 이때 전이경이 스퍼트를 하며 선두로 나섰다. 양양 A가 필사적인 추격전을 펼쳤지만 전이경의 오른발이 결승선을 먼저 통과했다. 전이경이 1분42초776, 양양 A가 1분43초343이었다.

전이경은 전날 500m에서도 동메달을 따 혼자 금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획득하는 활약 속에 올림픽 2회 연속 2관왕과 2개 종목 2연속 우승 기록을 세웠다.

한국은 남자 5,000m 릴레이에서 은메달, 전이경이 500m, 원혜경이 1,000m에서 동메달을 추가했다.

쇼트트랙은 선전했지만 1992년 알베르빌 대회 스피드스케이팅 1000m에서 은메달을 따 한국의 동계 올림픽 출전 사상 첫 메달의 주인공이 됐던 김윤만과 신예 이규혁이 상위권 입상에 실패하고 피겨스케이팅과 스키, 크로스컨트리 등에서 모두 하위권으로 밀리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72년 삿포로 대회에 이어 동계 올림픽을 2차례나 개최한 일본은 스키점프 금메달 1개에 머물렀던 1972년 대회와 달리 이 대회에서는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 스키점프 등에서 금메달 5개,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로 종합 순위 7위에 올랐다. 중국은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로 16위에 머물렀다.

이 대회에서 동계 종목의 강국인 독일(금 12 은 9 동 8)과 노르웨이(금 10 은 10 동 5), 러시아(금 9 은 6 동 3)가 종합 순위 1~3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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