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펜싱에서 금메달을 딴 김영호.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94년 제12회 히로시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한중(韓中) 싸움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한국(금 2 은 3 동 4)은 중국(금 5 은 2)에 이어 종목 2위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는 펜싱뿐만 아니라 여러 종목에서 변화가 있었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나라들이 출전했기 때문이다. 펜싱에서는 카자흐스탄(금 1 은 1 동 1)이 일본(은 2 동 3)을 제치고 종목 3위에 올랐다. <2편에서 계속>

한국 펜싱은 아시아 무대에서는 중국과 양강 체제를 구축하며 일정 수준의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세계 무대에서는 여전히 변방이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펜싱은 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개인전의 경우 남자 플러레에서 4년 뒤 한국 펜싱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김영호가 8위, 여자 에페에서 고정순이 8위를 한 것이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단체전의 경우 남자 플러러는 8강, 에페와 사브르는 1회전에서 탈락했다. 여자는 에페가 1회전에서 떨어졌다.

한국만이 아니고 중국 등 아시아 나라는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했다. 메달을 획득한 8개 나라거운데 쿠바만 빼고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 일색이었다.

1998년 방콕 대회에서 펜싱은 다시 한번 중국과 접전을 펼쳤다. 10개의 금메달을 두 나라가 5개씩 나눠 가진 가운데 한국이 은메달 5개와 동메달 2개로 은메달 3개와 동메달 5개인 중국에 간발의 차로 앞섰다.

이 대회 남자 플러레 개인전에서 김영호는 라이벌인 중국의 왕하빈에게 밀려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2년 뒤인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두 선수의 성적은 뒤집어진다.

시드니 올림픽 남자 플러레 개인전 조 편성에서 두 선수는 준결승에서 만나게 돼 있었다. 그러나 왕하빈이 32강이 겨룬 2회전에서 이탈리아의 살바토레 산조에게 10-15로 져 일찌감치 탈락하면서 아시아 선수 빅 매치는 불발됐다.

김영호는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뒤 2회전에서 프랑스의 프라이스 기야를 15-13, 16강전에서 미국의 클리프 베이어를 15-14로 따돌리고 메달권에 접근했다. 8강전에서 우크라이나의 셰리이 홀로부스키를 15-5로 가볍게 물리친 김영호는 준결승전에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플러레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러시아 멤버인 드미트리 셰브첸코를 15-14로 꺾고 대망의 결승 피스트에 섰다.

김영호는 독일의 랄프 비스도르프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 끝에 15-14로 이겨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때 처음으로 펜싱 종목에 출전한 이후 한국 펜싱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금빛으로 장식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 대회 남자 에페 개인전에서 이상기는 동메달을 보태 아시아 무대에서 착실하게 실력을 쌓아 세계 무대에서 성적으로 올린 한국 펜싱의 저력을 증명했다. 또 남자 에페 단체전에서는 3위 결정전에서 쿠바에 31-45로 져 메달 획득에 실패하는 등 이후 올림픽에서 선전을 예고했다.

아시아 무대에서 한국과 겨루면서 실력이 향상된 중국은 왕하이빈 등이 활약한 남자 플러레 단체전 은메달, 여자 에페 단체전 동메달을 기록하며 선전했다.

유럽 일색이었던 올림픽 펜싱 종목에 아시아 세력인 한국과 중국 두 나라가 한꺼번에 뛰어든 것이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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