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4년 사라예보(옛 유고슬라비아), 1988년 캘거리(캐나다) 대회 2연속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에 빛나는 동독 출신 카타리나 비트는 1994년 릴레함메르(노르웨이) 대회에 통일된 독일 선수로 올림픽 컴백 무대를 펼쳐 7위를 기록했다. 그때 비트는 피겨스케이팅 선수로는 꽤 많은 나이인 29살이었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20일 밤 늦은 시각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서 들려온 '남북 올림픽 참가 회의' 관련 소식은 반세기가 넘는 남북 체육 교류사에 한 획을 긋기에 충분하다.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이날 북한 선수단 규모를 46명으로 승인했다고 밝혔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 남북 단일팀으로 출전하는 북한 선수단은 선수 22명, 임원 24명으로 이뤄진다.

눈길을 끄는 내용은 개인전이 아닌, 단체 종목인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에 북한 선수 12명이 합류한다는 것이다. 개인전에 나서는 한국과 북한 선수는 각자 자기 국기를 달고 뛴다. 메달을 따면 각자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가 연주된다.

여자 아이스하키만 남북 단일팀 유니폼을 입는다. IOC는 북한 선수 12명을 더해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엔트리를 35명으로 결정했다. 남북 단일팀을 상징하는 구성이다.

남북한에 훨씬 앞서 동독과 서독은 1955년 6월 IOC 중재로 올림픽 단일팀을 만드는 데 합의한 뒤 1956년 코르티나 담페초(이탈리아) 동계 대회와 멜버른(호주) 하계 대회, 1960년 스쿼밸리(미국) 동계 대회와 로마(이탈리아) 하계 대회 그리고 1964년 인스부르크(오스트리아) 동계 대회와 도쿄(일본) 하계 대회에 단일팀으로 참가했다.

단일팀 이름은 독일(United Team of Germany), 단기는 흑적황(黑赤黃) 3색으로 디자인이 된 독일기에 오륜 마크를 달았으며 국가는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였다. 특정 종목만 단일팀이 이뤄진 평창 동계 올림픽 남북한 단일팀보다 더 나아간 형태였다.

독일 단일팀은 세 차례 동·하계 올림픽에서 각각 종합 순위 9~2~6, 7~4~4위를 기록했다. 뒷날 '통일 독일(United Germany)'로 출전하는 1992년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에서 1위, 바르셀로나 하계 올림픽에서 3위에 오른 것보다는 뒤지는 성적이지만 '베를린 장벽'이 동서 베를린을 가로막고 있는 분단 상태에서 하나의 독일로 출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독일 단일팀과 한국 스포츠는 인연이 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송순천은 한국인 첫 올림픽 은메달리스트가 됐다. 송순천이 복싱 밴텀급 결승에서 만난 상대인 볼프강 베렌트는 독일 단일팀 선수였는데 동독 출신이었다.

경기는 송순천이 우세한 가운데 끝났으나 판정은 베렌트의 승리였다.

베런트는 올림픽이 끝나고 귀국한 뒤 송순천을 잊을 수 없었다. 7년이 지난 1963년 베렌트는 서독에 사는 친구를 거쳐 대한체육회로 송순천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때 동독과 한국은 통신 교류가 불가능했다.

베렌트는 편지에서 "그날의 결승전, 그리고 당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게임은 당신이 이긴 것이었다. 서독의 친구에게서 당신이 최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선물이라도 보냈을 텐데…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둘의 재회는 이뤄지지 못했다. 도쿄 올림픽에 동독과 서독은 다시 한번 단일팀을 꾸려 출전했고 한국은 당시 기준 최대 규모 선수단을 파견했지만 두 선수 모두 국가 대표로 뽑히지 못했다. 그때 베렌트는 28살, 송순천은 30살이었다.

도쿄 올림픽을 끝으로 독일 단일팀은 이뤄지지 않았고 국내 스포츠 팬들은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 때 GDR[동독, 독일민주공화국] FRG[서독, 독일연방공화국] 팻말을 들고 입장하는 두 나라 선수들을 지켜봤다. 서울 올림픽에서 뛴 서독 선수로는 슈테피 그라프(테니스 여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동독 선수로는 크리스틴 오토(여자 수영 6관왕)가 있다.

동독과 서독은 1990년 통일 이후 1992년 알베르빌 동계 대회와 바르셀로나 하계 대회 때 단일팀보다 한 발 더 나아간 '통일 독일'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통일된 독일의 올림픽 출전은 1936년 가르미시-파르텐키르헨(독일) 동계 대회와 베를린(독일) 하계 대회 이후 56년 만의 일이었다.

1994년 릴레함메르(노르웨이) 동계 대회에서는 1984년 사라예보(옛 유고슬라비아), 1988년 캘거리(캐나다) 대회 2연속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에 빛나는 동독 출신 카타리나 비트가 올림픽 컴백 무대를 펼쳐 7위를 기록했다. 그때 비트는 피겨스케이팅 선수로는 꽤 많은 나이인 29살이었지만 통일된 독일 선수로 빙판을 누볐다. 이 종목 금메달리스트는 비트보다 12살이나 어린 옥사나 바이울(우크라이나)이었다.

▲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에서 비교적 쉽게 합의에 이른 단일팀 기를 들어 보이고 있는 양측 회담 대표들. ⓒ대한체육회

남북한 올림픽 단일팀의 기원은 196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2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59차 IOC 총회에서는 남북한이 올림픽에 단일팀으로 출전할 것을 권유하고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북한을 별개 팀으로 참가하도록 하겠다고 결의했다.

KOC(대한올림픽위원회)는 8월 IOC의 결의를 받아들였고 이듬해인 1963년 1월 IOC의 중재로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첫 회담이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다. 이어 홍콩으로 자리를 옮겨 제2차 회담, 제3차 회담이 잇따라 개최됐다.

IOC 관계자들이 배석한 가운데 진행된 로잔 회담에서 남북 양측은 *단일팀 구성에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국가는 광복 전에 부르던 '아리랑'으로 하고 *국기는 오륜 마크 밑에 영문자 'KOREA'로 잠정 결정하며 *선수 선발은 동·서독 단일팀 사례에 준한다는 등의 사항에 합의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이 되지 않은 시점으로, 남북 관계가 첨예했던 그때 체육인들이 이와 같은 내용의 합의를 이끌어 냈다는 사실은 평가받아야 한다.

5월 홍콩에서 속개된 제2차 회담에서 남 측은 선수단의 호칭을 '남북한 단일팀' 또는 '전한(全韓) 팀'을 제시했고 북 측은 '전 조선 유일 팀' 또는 '남북 조선 팀'을 주장해 양측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이 문제는 다음으로 미루고 선수 선발 등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토의를 시작했다. 남 측이 종목별 특성을 고려해 원칙 문제만 이 회담에서 합의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종목별 경기 단체에 위임하자고 제의한 반면 북 측은 선수 선발을 위한 예선 일시 및 장소를 이 회담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강력히 맞섰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양측은 제3차 회담 일시와 장소를 IOC를 거쳐 결정한다는 등의 합의를 하고 회담을 끝냈다. 그런데 제2차 회담을 마치고 돌아간 북 측 대표단이 평양방송으로 제2차 회담이 마치 남 측 대표단의 무성의로 난관에 봉착했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다음 회담의 날짜와 장소 문제가 혼선을 보였고 IOC의 조정으로 7월 홍콩에서 회담이 다시 열리게 됐다.

홍콩에 도착한 남 측 대표단은 회담에 나서는 북 측 대표단의 불성실한 자세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북 측도 즉각 반박 성명을 발표하면서 양측 대표단의 접촉이 이뤄지지 않았다. 양측 연락관 접촉으로 회담 절차에 대한 이견 조정에 들어갔으나 남 측이 평양방송의 비난 선전에 대해 북 측 대표단의 해명과 사과를 요구하자 북 측 연락관이 자리를 뜨면서 역사적인 첫 남북 체육 회담은 결렬됐다.

이때로부터 28년의 시간이 흘러 1991년 남북한은 탁구와 청소년 축구의 세계선수권대회 단일팀을 꾸렸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올림픽 단일팀을 구성하는 데에는 다시 27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바(일본)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 ‘코리아’ 선수단을 꾸릴 때 실무 회의는 판문점에서 열렸고 결과는 서울 삼청동에 있는 남북대화사무국으로 알리게 돼 있었다. 그런데 관계자들의 예상을 깨고 회의가 시작된 지 채 30분이 되지 않아 팩시밀리로 ‘코리아’ 선수단 명단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국제탁구연맹(ITTF)이 약속한 대로 한국과 북한이 확보한 출전권을 모두 포함한 대규모 선수단이었다. 남녀 단체전과 개인전 복식 조에 남북한 선수가 고루 섞여 있는 가운데 눈에 띄는 복식 조가 있었다. 유남규-현정화 조와 김성희-리분희 조였다. 남-남, 북-북 조였다.

서로의 경기력에 대해 훤히 꿰고 있는 한국과 북한 탁구 전문가들이 메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 2개 조만큼은 남북한 선수를 묶지 않았고 김성희-리분희 조는 기대대로 동메달을 차지했다. 국기 게양대에는 한반도기가 올라갔다.

‘통일 독일’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독립국가연합(옛 소련)과 미국에 이어 종합 순위 3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 육상 여자 멀리뛰기에서 우승한 하이케 드렉슬러는 동독, 테니스 남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보리스 베커는 서독 출신이었다.

반세기를 넘기면서 평행선을 달리던 올림픽 남북 단일팀이 이제 출발선에 섰다. 남북 스포츠 교류사를 볼 때 스포츠 외적인 요인의 영향을 받은 사례가 적지 않다. 잘 되는 듯하다가 가로막힌 일이 한두 차례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난관이 있더라도 단일팀 구성에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동독과 서독 스포츠 교류사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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