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성이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평행봉에서 금메달 연기를 펼치고 있다. ⓒ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그사이 기계체조가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 한국은 링에서 김국환, 평행봉에서 이영택이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영택은 개인 종합에서 동메달을 보탰다. 김휘철은 안마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다. 기계체조는 이후 1986년 서울 대회에서 금메달 3개와 은메달 4개, 동메달 4개를 딸 때까지 이 대회 성적이 가장 좋았다. 아시아경기대회에 성공적으로 데뷔한 것이다. <2편에서 계속>

1980년대까지 한국 기계체조 현주소는 김연아가 등장하기 전까지 피겨스케이팅과 비슷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남자(기계체조)와 여자(피겨스케이팅)의 활약상이 다를 뿐이다.

이때까지 우리나라 스포츠 팬들은 올가 코르부트(옛 소련, 1972년 뮌헨 올림픽 4관왕)와 나디아 코마네치(루마니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3관왕) 그리고 한국계인 넬리 킴(소련,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3관왕) 같은 체조 요정들의 환성적인 연기를 보며 '우리는 언제 저런 선수들을 볼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세계적인 여자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의 아름다운 연기를 보면서 그랬듯이. 넬리 킴은 뒷날 태릉선수촌에서 모국의 후배들을 가르치게 된다.

그 무렵만 해도 기계체조는 아시아 정상에 서는 것조차 힘겨웠다. 1974년 테헤란 대회 때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기계체조에서 한국은 금메달 2개와 동메달 2개로 비교적 순조롭게 출발했다. 아시아경기대회에 첫 출전한 중국(금 8 은 8 동 2)과 중국 이전에 세계적인 기계체조 강국으로 이름을 떨치던 일본(금 4 은 3 동 2)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거둔, 평가 받을 만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1978년 방콕 대회에서 한국은 여자 단체전과 여자 뜀틀의 정진애가 은메달을, 남자 단체전과 남자 마루운동의 김휘철이 동메달을 획득했을 뿐이다. 중국(금 10 은 8 동 5)의 위세는 더욱 강해졌고 북한(금 2 은 1 동 2)에도 밀렸다.

1982년 뉴델리 대회에서는 성적이 더 나빠졌다. 남자 뜀틀의 나권과 여자 뜀틀의 이정희가 각각 동메달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기계체조 아시아 3강은 중국(금 12 은 9 동 2)과 북한(금 3 은 5 동 4), 일본(금 2 은 3 동 2)으로 이뤘다.

1964년 도쿄 대회(금 5 은 4 동 1)와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금 6 은 2 동 4)에서 기계체조 종목 1위, 1972 뮌헨 대회(금 5 은 5 동 6)에서 2위,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3위(금 3 은 4 동 3)를 차지하며 올림픽 무대에서 위용을 떨쳤던 일본의 몰락이 두드러졌다.

아시아 기계체조 판도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열린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기계체조 발전의 결정적인 발판이 마련됐다. 이 대회 전까지 한국이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획득한 기계체조 금메달은 단 두 개였다. 1974년 테헤란 대회 남자 링의 김국환, 평행봉의 이영택 이후 금메달리스트가 없었다.

일본과 중국이 번갈아 가며 기계체조 강국으로 아시아 무대를 휘젓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서울 대회에서 남자 평행봉의 권순성, 여자 평균대의 서선앵과 이단평행봉의 서연희가 금메달 연기를 펼쳤고 남녀 단체전에서는 일본을 제치고 2위에 오르는 이변을 일으켰다. 북한이 불참한 가운데 기계체조 아시아 3강은 중국(금 12 은 8 동 5)과 한국(금 3 은 4 동 6) 일본(은 1 동 4)으로 재편됐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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