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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시아경기대회 출전사…(5) 1970년 서울 대회를 반납한 뼈아픈 사연

신명철 smc@spotvnews.co.kr 2018년 04월 02일 월요일
▲ 1968년 5월 서울에서 열린 AGF(아시아경기연맹) 긴급 특별 총회에서 1970년 제6회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반납이 결정됐다. ⓒ대한체육회
한국에서 30년 만에 열린 올림픽인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4년마다 돌아오는 ‘메가 스포츠 이벤트’ 해인 올해 또 하나의 국제 종합 경가 대회는 제18회 하계 아시아경기대회다. 이번 대회는 1962년 제4회 대회(자카르타) 이후 56년 만에 인도네시아에서 열린다. 8월 18일부터 9월 2일까지 자카르타와 팔렘방에서 개최되는 이번 대회에서는 40개 종목에서 462개의 금메달을 놓고 우정의 경쟁을 펼칠 예정이다. 한국은 195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대회는 한국전쟁 와중에 불참했지만 1954년 제2회 마닐라 대회부터 꾸준히 출전하며 아시아의 스포츠 강국으로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한국의 아시안게임 출전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기간 한국은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 유치에 성공해 체육인들은 잠시나마 기쁨을 맛보았다.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서울에 유치하려는 움직임은 1950년대부터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탁상공론 수준이었다. 실질적인 유치 노력은 1966년 6월 장기영이 KOC(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면서 시작돼 7월 19일 유치위원회가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8월 5일에는 서울시에서 유치 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8월부터 11월 사이에 유치 교섭단을 3차에 나눠 AGF[아시아경기연맹,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 전신] 회원국에 파견했다.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 유치 경쟁국으로는 자유중국(오늘날 대만), 이란, 말레이시아, 이스라엘, 실론(오늘날 스리랑카) 등이 꼽혔다. 이스라엘은 이때 아시아 지역에서 스포츠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치 경쟁 과정에서 말레이시아, 이란 등 대부분의 나라가 유치 신청을 포기하고 한국과 실론만 남았다. 그러나 실론도 이 대회 기간인 12월 15일 AGF 총회 직전 유치 신청을 철회해 한국은 만장일치로 제6회 아시아대회 개최지로 결정됐다.

그러나 대회 유치 과정에서 예산이 방콕 대회의 6분의 1 수준으로 책정되는가 하면 정부도 유치와 유치 포기 등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여 불안감이 감돌았다. 결국 이듬해인 1967년 3월 27일 KOC는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의 서울 개최권을 반납한다는 내용을 AGF 회원국과 AGF 집행 위원들에게 통보했다.

경제 개발에 국력을 쏟아붓고 있던 때여서 대회 반납은 옳은 결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흔치 않은 사례인 데다 한국 대신 대회를 개최할 나라를 찾는 과정도 순탄치 않아 체육인들의 상심은 컸다. 당시 주요 외신들은 한국이 재정적인 어려움과 북한의 도발 우려 때문에 대회를 반납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한국은 대체 개최국으로 일본을 꼽고 접촉했으나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을 유치해 놓은 일본은 난색을 보였다. 한국은 태국으로 방향을 바꿔 태국올림픽위원회의 승낙을 받아 반납 의사를 밝힌 지 1년 여 만인 1968년 5월 1일 서울에서 열린 AGF 긴급 특별 총회에서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대회 반납 절차를 마쳤다. 태국에는 25만 달러의 적자 보전금을 지불했다. 느닷없이 대회를 인수 받은 방콕은 이후 1978년 제8회 대회, 1998년 제13회 대회까지 20세기에만 네 차례나 아시아경기대회를 여는 단골 개최지가 됐다.

한편 1966년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대한체육회와 KOC로 이분화 돼 있는 국가 대표 선수 관리 체계가 문제를 일으켰다. 대한체육회와 KOC가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방콕 현지에서 벌인 여러 가지 말썽으로 손기정 단장이 삭발한 채 귀국하는 볼썽사나운 장면이 펼쳐졌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대한학교체육회는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고 KOC는 독립적인 단체 또는 대한체육회 내 독립성을 지닌 기구, 완전 분리 등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대한체육회와 KOC의 대립이 표면화된 1966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당시에는 두 단체가 완전 분리돼 있었다. 두 단체의 불협화음은 체육 3단체 통합의 시발점이 됐다.

방콕 아시아경기대회가 끝나고 이듬해인 1967년 1월 22일 서울 유네스코회관에서 문교부 장관 주재 아래 체육 3단체장이 모여 회의를 갖고 통합에 대한 원칙과 절차에 합의하고 가칭 '통합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런데 체육 3단체 통합과 관련해 주목할 내용이 있다. 196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문교부 연초 순시에서 체육 단체 통합을 조속히 이루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방콕 사태'가 일어나기 훨씬 전이었다. 대통령의 관심 사항일 정도로 체육 단체의 통합은 시대적 과제였던 셈이다.

이 같은 일련의 흐름 속에 1968년 2월 12일 대한체육회는 31개 경기 단체장 간담회를 열고 통합에 대해 협의하고 통합 문제에 대한 대한체육회 이사회 결의 사항에 대한 찬성을 받았다. 대한체육회는 이에 앞서 2월 1일자로 발표된 이사회 명의 결의문에서는 "체육 단체의 통합이 국가와 민족적 이익을 바탕으로 하며 체육 선배와 동호인의 공적이 헛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통합을 위해 임원이 적절한 시점에 총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가칭 통합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통합 원칙에 합의했다. *대한체육회, 대한학교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KOC)와 아마추어 체육 단체는 아마추어 총괄 단체인 가칭 사단법인 대한체육회로 통합한다. *1차적으로 대한체육회, KOC, 학교체육회를 통합하고 신(新) 단체 발족 이후 동(同) 단체를 모체로 하여 기타 아마추어 단체를 통합한다. *KOC를 신 단체의 특별 기구로 한다. *대한체육회 가맹 단체의 시도 지부는 학교체육회, 경기 연맹 및 시도 지부를 통합한다. 조직의 원칙에도 합의한 가운데 KOC는 특별 기구로 하되 KOC 위원장은 대한체육회장이 겸직한다고 못 박았다. KOC를 특별 기구로 명시한 것은 대외적인 성격을 고려한 결과였다.

3월 16일 열린 대한체육회 임시 대의원총회에서는 체육 단체 통합을 근간으로 한 정관 개정안이 통과된 데 이어 명예 회장 장기영(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회장 민관식, 부회장 정월타(전 KOC 부위원장), 김종락(전 대한체육회 부회장), 성동준(전 문교부 차관)을 회장단으로 하는 집행부가 구성됐다. 개정된 정관에 따라 대한체육회의 영문 명칭이 종전의 KAAA(Korea Amateur Athletic Association)에서 KASA(Korean Amateur Sports Association)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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