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후배 선수들을 보기 위해 한양대 올림픽 체육관을 방문한 김호철 남자 배구 대표 팀 감독 ⓒ 한양대 올림픽체육관, 스포티비뉴스

[스포티비뉴스=한양대, 조영준 기자] "우리 남자 배구는 한때 아시아를 호령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중국과 일본을 모두 무너뜨렸죠. 세계 상위권에 오르는 것은 힘들지만 아시아 맹주 자리는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아시아에 있는 국가들만 이기면 되는 것은 아니죠. 한국 배구는 세계적인 수준에 맞춰서 성장해야 합니다. 옛 영광을 되찾는데 초석을 다지고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50년이 넘는 배구 인생을 걸어온 그는 막중한 책임감이 생겼다. 더는 떨어질 곳이 없는 위기에 몰린 한국 남자 배구를 살리는 데 양 소매를 걷어 올렸다.

김호철(63) 남자 배구 대표 팀은 모교인 한양대에서 후배들을 지켜봤다. 그의 요즘 고민은 눈앞의 성적이 아니다. 자존심을 잃은 한국 남자 배구를 일으켜 세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단기적인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인 성과를 위해 유망주 발굴에 나섰다.

김 감독은 한국 배구 발전을 위해 감독전임제가 필요하다고 예전부터 주장했다. 그동안 남녀 배구 팀은 단임제로 짧은 기간 성과를 내는데 급했다. 미래를 대비하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대표 팀을 운영한 결과는 혹독했다. 여자 배구의 경우 불세출의 선수인 김연경(30, 중국 상하이)이 있어서 그나마 올림픽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반면 남자 배구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

여러 문제점 가운데 장기적으로 대표 팀을 관리할 감독이 자주 바뀐다는 점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한국 배구는 올해 처음으로 남녀 대표 팀 전임제를 시행했다.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은 이는 김 감독과 차해원(57) 여자 배구 대표 팀 감독이다.

전임제를 주장했던 김 감독에게 이 소식은 매우 반가웠다. 그러나 그는 감독 발표 한 달여 만에야 계약서에 사인했다. 협회가 제시한 계약서는 전임 감독제가 아닌 예전 단임제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제시한 계약서는 오는 8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과 2년 뒤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감독을 검증하겠다는 조항이 있었다. 남자 배구 발전의 장기적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김 감독은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감독 전임제라는 것은 일정기간 그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중간 검증하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전임감독으로 뽑아놓고 짧은 기간 다시 검증한다는 것은 결국 믿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처음 계약서를 받아보고 이것은 전임감독제 계약서가 아니라고 주장했죠. 전임 감독이라고 해놓고 성적으로 재평가 하면 단임제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당장 성적 내기에 급급하지 어떻게 제가 장기적인 프로그램을 짜고 청소년 유망주들을 보러 다닐 수 있겠습니까?"

우여곡절 끝에 협회는 김 감독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계약서를 수정했다. 오한남 대한배구협회장도 김 감독의 말이 맞다며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협상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고 결국 지난 달 26일 합의했다.

▲ 한양대 올림픽 체육관에서 후배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는 김호철 남자 배구 대표 팀 감독 ⓒ 한양대 올림픽체육관, 스포티비뉴스

국내용이 아닌 국제용 선수 필요…亞게임은 미필자보다 각 포지션 최고 선수에게 우선권

마침내 김 감독은 자신이 구상한 퍼즐을 맞출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지금은 이제 출발점에 선 것"이라며 신중하게 말했다. 그동안 남자 대표 팀은 체계적인 원칙 없이 망망대해를 헤맸다. 이제 겨우 나침반을 손에 쥔 것뿐이다. 국제 대회 경쟁력을 높이는 것은 물론 아시아 최강을 찾기 위한 여정이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당장은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 목표는 앞으로 한국 남자 배구 대표 팀이 성장해나갈 수 있는 초석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저의 뒤를 이어 다음 지도자가 맡아도 국제 대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팀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경쟁력 있는 대표 팀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1990년대 초반부터 10년간 세계 배구 최강으로 군림했던 이탈리아는 각 구단이 유망주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이 시기에 결실을 맺었고 미국과 러시아 등 강호들을 제치며 세계 최강으로 우뚝섰다.

이 과정을 지켜본 김 감독은 기존 선수 외 '가능성이 있는 유망주' 발굴에 나섰다. 그는 지난겨울 프로 리그는 물론 대학, 고교 등을 돌며 '진주 찾기'에 나섰다. 그러나 당장 대학 선수들을 대표 팀으로 뽑기는 쉽지 않다. 봄 부터 가을까지 대학배구 리그가 열린다. 또 학점제 도입으로 선수들을 데려오기 어렵게 됐다.

"현실적으로 대학 선수를 당장 뽑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올 겨울에는 대학 및 고등학교 유망주들을 포함한 어린 선수들을 뽑고 면밀하게 검증해볼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프로 선수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국내용'과 '국제용' 선수가 있어요. 우리가 찾는 선수는 후자입니다. 국제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선수를 발굴하고 육성할 생각입니다."

김 감독은 국내 리그에서 아직 크게 빛을 보지 못한 나경복(24, 우리카드, 198cm)을 발탁했다.

"나경복은 체격조건이 좋고 정말 가능성이 있는 선수입니다. 저는 이 선수를 직접 보고 검증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올해 남자 배구 대표 팀에 가장 중요한 국제 대회는 아시안게임이다.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딸 경우 미필자 선수들은 군 문제를 해결한다. 아시안게임에 출전할 대표 팀이 미필자 선수들로 구성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김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저는 대표 팀은 각 포지션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가 모이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원칙은 변함이 없어요. 그러나 기량이 비슷할 경우에는 미필자 선수에게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이 점이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죠. 그래도 우선되는 것은 각 포지션에서 가장 기량이 뛰어난 선수입니다."

▲ 지난해 선수들과 AVC 아시아남자배구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출국을 앞두고 선수들과 기념 촬영하고 있는 김호철 감독(가운데) ⓒ 스포티비뉴스

아시아 맹주를 되찾기 위한 여정…"옛 영광 되찾고 싶다"

남자 대표 팀은 여자 팀과 지난 15일 충북 진천선수촌에 소집됐다. 여자 대표 팀은 김연경의 등장 이후 국제 대회는 물론 국내 리그의 인기도 높아졌다. 반면 과거 스타들이 줄줄이 등장했던 남자 배구의 '거포 계보'는 어느 순간 멈췄다.

한국 남자 배구를 대표하는 공격수인 문성민(32)과 붙박이 미들 블로커 신영석(32, 이상 현대캐피탈)은 서른을 훌쩍 넘었다. 전광인(27)과 서재덕(29)은 부상으로 고생하고 있다.

"예전에는 선수들이 한두 명 씩이 등장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남자 배구는 침체기에 빠졌습니다. 이런 문제도 안이하게 대처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되죠. 지금이라도 감독 전임제도를 만들고 계획을 세워서 위기에서 탈출하려고 합니다."

김 감독이 유망주 발굴과 육성에 관심을 쏟는 점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국제 대회 같은 큰 경험의 장에서 무럭무럭 성장해 한국 남자 배구의 미래를 이끌어갈 선수를 찾고 있다.

세터 출신은 김 감독은 이 포지션 운영 방안도 털어놓았다.

"(노)재욱이가 부상으로 이번 대표 팀에는 합류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내이션스발리볼리그(VNL)에서는 (이)민규(OK저축은행)와 (황)택의(KB손해보험)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번에 새롭게 가세한 황승빈(대한항공)도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VNL가 끝난 뒤 아시안게임을 준비할 때는 한선수(33, 대한항공)도 불러들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

프로 선수는 물론 어린 유망주까지 폭넓게 선수 발굴에 나선 김 감독은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팀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한국 남자 배구는 한때 아시아를 호령했습니다. 세계 무대 상위권에 가는 것은 어렵지만 아시아 맹주 자리는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아시아 국가들만 이기는 팀이 되자는 것은 아니죠. 세계적인 수준에 맞춰 성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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