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무더기 메달을 딴 복싱 선수들. 왼쪽부터 박형석(라이트미들급 금) 박형춘(라이트헤비급 은) 김현치(라이트급 금) 김태호(밴텀급 은) 지용주(플라이급 금) 김성은(페더급 금) 김충배(라이트플라이급 금) ⓒ대한체육회

한국에서 30년 만에 열린 올림픽인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4년마다 돌아오는 ‘메가 스포츠 이벤트’ 해인 올해 또 하나의 국제 종합 경가 대회는 제18회 하계 아시아경기대회다. 이번 대회는 1962년 제4회 대회(자카르타) 이후 56년 만에 인도네시아에서 열린다. 8월 18일부터 9월 2일까지 자카르타와 팔렘방에서 개최되는 이번 대회에서는 40개 종목에서 462개의 금메달을 놓고 우정의 경쟁을 펼칠 예정이다. 한국은 195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대회는 한국전쟁 와중에 불참했지만 1954년 제2회 마닐라 대회부터 꾸준히 출전하며 아시아의 스포츠 강국으로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한국의 아시안게임 출전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복싱

1980년대까지 국제 종합 경기 대회에서 복싱이 이바지한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대회에서 복싱은 11체급이 벌어졌다. 한국은 이 가운데 6체급의 금메달을 휩쓰는 놀라운 전적을 올렸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12개 전 체급 우승의 신화를 쓰지만 이는 홈 링에서 일어난 일이다. 홈 텃세가 세기로 유명하고 복싱을 무척 좋아하는 태국에서 벌어진 대회에서 이 같은 성적을 올린 건 평가할 만하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라이트플라이급 은메달리스트 지용주는 플라이급으로 체급을 올려 아시아 챔피언이 됐다. 지용주 외에 라이트플라이급 김충배, 페더급 김성은, 라이트급 김현치, 웰터급 정영근, 라이트미들급 박형석이 금메달의 영광을 안았다. 라이트헤비급 박형춘은 은메달, 밴텀급 김태호와 헤비급 김상만은 동메달을 보탰다.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가 단 두 명일 정도로 이 대회 복싱 종목은 한국의 독무대였다.

#역도

중량급에서 기세를 올렸다. 미들헤비급 윤석원은 합계 450kg으로, 헤비급 김대주는 합계 430kg으로 금메달을 들어 올렸다. 라이트급 원신희는 은메달, 밴텀급 최문재와 미들급 이춘식 그리고 라이트헤비급의 박문수는 동메달을 보탰다.

#레슬링

다른 종목에 비해 다소 부진했다. 자유형 밴텀급 안재원이 은메달, 주니어플라이급 김화경과 플라이급 김영준 그리고 페더급 김문기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배드민턴

1962년 제43회 전국체육대회 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며 다른 종목에 견줘 비교적 늦게 국제무대에 나선 배드민턴은 전 대회인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3위를 한 데 이어 이 대회 같은 종목에서 또다시 동메달을 따며 성장세를 이어 갔다.

#배구

남녀 모두 일본의 벽을 넘지 못하며 풀리그로 진행된 경기에서 각각 6승1패를 기록하며 은메달에 만족했다. 남자는 일본에 세트스코어 0-3(6-15 4-15 5-15)로 완패했으나 김영자, 조혜정, 이순복 등이 분전한 여자는 일본에 세스코어 1-3(4-15 12-15 15-13 9-15)으로 따라붙으며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축구와 농구 동반 우승

축구와 농구는 대회 첫 우승에 대한 나름대로 열망도 있었거니와 경기력도 우승권에 접근해 있었다.

축구는 1956년, 1960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2연속 우승하며 아시아 정상의 실력을 자랑했지만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1966년 제5회 방콕 대회에서는 태국에 0-3, 버마(오늘날 미얀마)에 0-1로 져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해 북한이 8강에 오른 잉글랜드 월드컵 지역 예선에는 북한의 전력을 의식해 출전을 포기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 가운데 양지 팀을 중심으로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을 목표로 전력을 다졌다. 월드컵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축구 국가 대표 팀 전력은 알게 모르게 향상돼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맞이한 대회가 이 대회였다.

대회 직전인 11월 열린 제3회 킹스컵대회에서 우승하며 기세를 올린 한국은 1차 조별 리그 C조 첫 경기에서 난적 이란을 1-0으로 꺾은 뒤 인도네시아와 0-0으로 비겨 2차 조별 리그에 올랐다. 2차 리그 첫 상대는 홈그라운드의 태국이었다. 직전 대회 농구 경기에 못지않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경기가 펼쳐져 박이천, 정강지, 김호 등이 관중석에서 날아 온 빈병과 돌에 맞아 그라운드에 쓰러지기도 하는 가운데 2-1로 이겼다.

두 번째 경기에서 버마에 0-1로 졌지만 조 2위로 준결승전에 올라 라이벌 일본과 맞붙게 됐다. 전해인 1969년 멕시코 월드컵 15-A조 예선에서 1승1무로 앞섰던 한국은 연장 접전 끝에 2-1로 또다시 승리를 거두고 대망의 결승전에 올라 버마와 다시 만나 0-0으로 비기면서 대회 출전 사상 첫 우승을 거뒀다.

전해인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처음 우승한 여세를 몰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1위에 오르는 등 농구도 전력이 급상승하고 있었다.

한국은 조별 리그에서 이란을 110-77, 홍콩을 116-51로 연파한 데 이어 필리핀을 79-77로 따돌리고 조 1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결승 리그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잡혔으나 강호 이스라엘을 81-67로 물리쳐 물고 물리는 혼전 속에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한국은 구기 종목에서도 좋은 성적으로 거두면서 출전 선수 131명 가운데 108명이 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하는 놀라운 전적을 올렸다. 한국이 금메달 18개와 은메달 13개, 동메달 23개로 일본(금 74 은 47 동 23)에 이어 종합 순위 2위를 차지한 가운데 태국(금 9 은 17 동 13), 이란(금 9 은 7 동 7)이 각각 3위와 4위에 올랐다. 금메달을 기준으로 직전 대회 78-12에서 74-18로 일본과 격차를 좁힌 것은 물론 홈 이점을 안고 있던 태국을 완전히 따돌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결과였다.

이란은 제1회 대회 3위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인 종합 4위에 오르며 차기 대회 개최국의 면모를 살렸다. 이란은 1974년 테헤란 대회에서 아시아경기대회에 처음 출전한 당시 기준으로는 잠재적 스포츠 강국이었던 중국을 제치고 종합 순위 2위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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