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8년 평양에서 열린 경성(서울) 평양 함흥 3도시 대항전에서 우승한 함흥축구단 ⓒ한국 축구 10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대성학교와 숭실학교 졸업생들이 무오단이라는 체육 단체를 조직하자 축구는 숭실학교와 무오단의 대항전으로 발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1918년 10월 17일 동아연초[煙草, 담배) 공장 운동장에서 일본인들의 전평양과 전숭실이 야구 경기를 가졌다. 경기는 9회 초 전숭실 공격 때 13-13으로 동점이 되자 전평양이 심판의 판정에 이의를 제기해 옥신각신 끝에 결국 무승부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축구도 경기를 갖기는 했으나 정규 룰에 따라 치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기록에 남길 만한 경기가 없었다. 1919년까지만 해도 숭실학교 운동장과 경상운동장(담배공장 운동장)에는 골포스트가 없었다.

1920년 창간된 동아일보에 따르면 무오단은 무오년[戊午年, 1918년]에 창단됐으며 주로 축구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으나 때로 정구와 야구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무오단은 대성학교와 숭실학교 졸업생들이 주류를 이뤘으나 숭실대학생들도 참여했다. 무오단이 숭실과 대결할 때는 무오단의 숭실대학생은 숭실로 돌아가서 뛰었다.

1920년 광성고보에 축구 팀이 생겨 숭실학교와 경기를 갖게 됐고 이어 평양고보, 숭덕학교 고등과도 축구 팀을 창설해 숭실학교, 광성고보와 대항전을 자주 가졌다. 여기에 나오는 광성고보는 지금 서울에 있는 광성고등학교다.

평양의 체육계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통할하는 단체로 평양YMCA가 나서게 된다. 1921년 4월 1일 김동원 김찬흥 박종은 등 기독교계 유지들 발기로 태어난 평양YMCA는 회장에 김득수(광성고보 교장), 부회장에 김동원(산정현교회 장로), 명예 총무에 모의리(숭실대학 교수), 총무에 조만식을 각각 추대했다.

평양YMCA의 첫 체육 사업은 그해 5월 19일부터 이틀 동안 숭실학교 운동장에서 주최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였다. 이 대회 중학단에는 평양의 숭실중학, 광성고보, 숭덕학교 고등과, 평양고보 그리고 선천(평안북도) 신성과 서울의 휘문고보가 출전했다. 청년단에는 전숭실단, 기명운동단, 평양무오단, 전광성단, 서울의 불교청년회, 천도교청년회, 서울청년회, 반도청년회가 참가했다.

중학단에서는 서울에서 수학여행을 겸해서 온 휘문고보가 우승했고 청년단의 준결승에서 천도교청년회와 전숭실단이 분규 끝에 모두 기권하는 바람에 평양무오단이 결승에서 겨루지 않고 우승했다.

1922년 제2회 대회에서는 숭실중학과 평양 무오단이 각각 우승했고 1923년 제3회 대회에서는 소학단 경기도 마련됐다. 이 대회는 1926년 제6회 대회까지 이어지다가 1925년부터 시작된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에 흡수된다.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는 서울의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전조선축구대회 못지않은 규모와 권위를 자랑했다.

1920년 7월 서울에서 조선체육회가 태어나긴 했지만 평양에도 통일된 체육 기관이 필요하다는 체육인들 뜻에 따라 1925년 2월 평양YMCA회관에서 관서체육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정세윤을 추대했다. 관서체육회는 축구뿐만 아니라 정구와 탁구, 수영, 배구, 농구 등 각종 경기의 행사를 활발히 벌여 이 땅의 체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관서체육회는 축구 대회에 힘을 기울여 발전해 나가다가 1931년 가을부터 기림공설운동장에서 종합체육대회를 열었다. 서울의 조선체육회가 본격적인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1934년에야 개최한 것을 생각한다면 관서체육회의 조직력과 대회 운영 능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뜨거운 축구 열기를 배경으로 평양은 축구가 강한 도시로 성장했다. 1928년 숭실중학이 전일본중등학교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한반도는 물론 일본까지 포함해 중등부 축구의 최강자로 떠오른 것이다.

1929년 시작된 경성과 평양 두 도시의 축구 대항전인 첫 경평전에서 3차례 경기 가운데 2차례를 평양축구단이 이겼을 정도로 평양 축구의 수준은 향상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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