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0년대 여자 육상의 선두 주자였던 평양여고 선수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28년 숭실대학 강당이 완공되자 평양의 실내 경기는 단연 활기를 띠게 됐다. 1928년 6월 1평양에서는 처음으로 관서농구대회가 평양YMCA 주최로 열려 중학단에 숭실중학, 숭인상업 청년단에 숭실전문, 전광성고, 평양YMCA 등이 출전했다. 중학단에서는 숭실중학, 청년단에서는 평양YMCA가 각각 우승했다.

실내 코트를 갖추게 된 평양은 1931년부터 동계 농구연맹전을 시작했다. 평양 농구는 축구 못지않은 발전을 보여 광성고보가 1934년 전일본중등학교농구선수권대회에서 35개 팀 가운데 준우승을 차지했다. 1935년 메이지신궁대회 농구 중등부에서는 숭인상업이 우승했다.

기독교 영향이 강했던 선천(평안북도)은 근대 스포츠를 빨리 받아들여 선천의 신성학교는 평양과 서울에서 열리는 야구와 정구, 축구 등 각종 대회에 출전해 좋은 전적을 거뒀다.

원산으로부터 함흥, 성진, 청진, 경성에 이르는 함경도에서는 축구와 정구가 어느 고을에서나 열렸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교통이 불편해 서울이나 평양으로 가기가 어려워 지역별 대회를 중심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5월 원산에서 시민대운동회, 7월 경성에서 북선(북조선)정구대회, 8월 함흥에서 함남 정구대회 등이 열렸다. 1921년 8월 함흥에서 열린 함남정구대회, 1922년 8월과 1923년 8월 나남에서 각각 벌어진 북선(북조선)축구대회, 1923년 9월 함흥에서 개최된 함흥소년정구대회와 10월 열린 함남야구대회 그리고 1924년 5월 영흥에서 벌어진 함경축구대회, 1924년 59일 북간도 용정에서 열린 전간도축구대회 등은 이들 지방의 체육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러한 체육 활동은 뒷날 청진축구단, 함흥축구단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바탕이 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남한 지역이었던 개성에서는 송도고보가 체육 진흥에 앞장섰다. 송도고보는 야구, 축구, 정구 등 일제 강점기 인기 있던 여러 종목에 수많은 우수 선수를 배출했고 전국 규모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렸다. 여기에서 송도고보는 지금 인천에 있는 송도고등학교다.

1921년 7월 함흥, 원산 지방으로 원정을 떠난 송도고보 야구단은 8전 전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서 일본인들로 이뤄진 전업구락부를 12-5로 완파했다.

개성에서 제대로 규모를 갖춘 경기대회는 1922년 7월 신생활사와 개벽사 개성 지국이 공동 주최한 제1회 전조선정구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송도고보의 유은상-한진영 조가 우승했다. 1922년 9월 열린 제2회 대회에서는 송도고보의 김명환-한진영 조가 우승했다. 1923년 5월 벌어진 제3회 대회에서는 서울 휘문고보의 김명환-손흥윤 조에게 우승이 넘어갔다.

1920년 6월 창립된 개성 고려청년회는 1934년부터 전조선여자탁구대회를 열었고 1935년에는 개성부(府)가 운영하는 부영수영장(25m 코스)에서 제1회 전조선수영대회를 개최했다. 개성은 정구와 탁구에서 우수 선수를 많이 배출했으며 전 조선 대표 선수가 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황해도에서는 1920년 이후 축구 인구가 많이 늘어 재령, 신천, 안악 등지를 중심으로 발전했고 1922년 6월 8일부터 이틀 동안 재령청년회가 주최한 제1회 황해도축구대회는 큰 인기를 모았다. 이 대회는 몇 년 뒤 리그전으로 발전해 각 군이 돌아가면서 개최하게 된다.

1930년대 전반 한반도는 평양축구단, 경성축구단, 함흥축구단 등 도시 축구 3강의 대항전과 각종 축구대회에서 벌어지는 사학의 명문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대결인 연보전이 많은 축구 팬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더구나 축구는 한민족이 일본을 압도하고 있던 종목이라 당시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즐기는 야구보다 축구를 더 좋아하고 있었다.

서울과 평양의 축구 대항전인 경평축구전은 조선일보 주최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열렸으며 서울, 평양, 함흥의 세 도시가 참가한 축구 3도시대항전은 조선축구협회 주최로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이 땅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정기 대항전뿐만 아니라 각종 축구대회에서 서울, 평양, 함흥이 마주치는 경기는 많은 관중이 몰려들었고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대결도 마찬가지였다.

전 조선 규모의 축구대회는 여전히 조선체육회가 주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다른 종목의 경기인들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축구인들도 조선체육회의 창립 정신에 바탕을 둔 전통과 권위를 존중해 조선체육회를 중심으로 모든 종목이 단결해야 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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