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10월 11일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에 앞서 남북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손을 맞잡고 입장하고 있다. 앞줄 왼쪽은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FIFA 20세 이하 월드컵 전신) 4강을 이끈 박종환 감독. 이때는 국가 대표 팀 사령탑을 맡고 있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는 남북 스포츠 교류에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대회 직후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남북통일축구경기’가 열렸기 때문이다.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기간인 그해 9월 29일 남북 양측은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통일축구경기를 갖는다는 내용의 합의 사항을 발표했다. 합의 사항에는 *교환 경기 명칭은 남북통일축구경기대회 *경기 일정은 1차 경기는 10월 11일 평양에서, 2차 경기는 10월 23일 서울에서 *참가 인원은 남자 및 여자 축구 선수단, 보도진 및 그 밖의 관계 인원 *남 측 인솔 책임자는 정동성(작고) 체육부 장관 등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같은 합의가 가능한 배경에는 9월 5일 서울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과 곧이어 10월 17일 평양에서 개최될 제2차 회담이 있었다. 마침 베이징 대회에는 남 측에서는 장충식 남북 체육 회담 수석 대표가 한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하고 있었고, 북 측에서는 김형진 남북 체육 회담 단장이 파견돼 있었다.

순수한 남북 체육 회담의 범주에서 남북 축구 교환 경기의 실현 가능성을 협의하라는 정부의 훈령을 받은 장충식 단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북 측 김형진 단장과 접촉한 결과 1946년 경평전을 끝으로 단절된 남북 축구의 교류는 물론 남북 스포츠 교류 전반에 걸친 역사적인 합의를 이뤘다.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폐막 다음 날인 10월 9일 남녀 축구 대표 선수들을 포함한 남 측 선수단은 북 측이 제공한 조선민항(고려항공 전신) 비행기를 타고 평양으로 갔다. 이틀 뒤인 11일 평양 능라도에 있는 5·1경기장에서 벌어진 1차 경기에서 북 측은 윤정수와 탁영빈, 남 측은 김주성이 골을 넣어 2-1로 북 측이 이겼다. 그러나 승패가 중요한 경기가 아니었다.

경기 외적으로도 남북한 동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일이 있었다. 남 측 선수단 고문 자격으로 평양에 간 이회택 포철 감독은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 이용진 씨를 만나 감격의 포옹을 했다. 1차 경기를 마친 남 측 선수단은 14일 판문점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김유순(작고) 북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북 측 선수단은 10월 21일 판문점을 통과해 서울로 왔다. 이틀 뒤인 23일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벌어진 2차 경기에서 남 측은 황선홍의 골로 1-0으로 이겼다.

글쓴이는 평양 경기는 취재하지 못했지만 서울 경기는, 축구 담당 기자가 아닌데도 취재할 기회를 가졌다. 이 같은 기회를 갖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기간 글쓴이는 우연한 기회에 북한 이 아무개 기자와 안면을 트게 됐다. 이 아무개 기자는 글쓴이보다 10살 정도 위였다. 그래서 한국 기자 사회 관례대로 님 자를 붙이지 않고 그냥 선배로 불렀다. 뒤에 알고 보니 이 아무개 선배는 1972년 첫 남북적십자회담 때 한국에 온 적이 있는 관록 있는 기자였다.

글쓴이와 이 아무개 기자는 하루 경기가 마무리되면 맥주도 마시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도 하며 교류했다. 그런데 이 아무개 기자는 글쓴이와 만날 때 북한 사람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김일성 배지를 달고 나오지 않았다. “이 선배, (김일성) 배지를 달지 않아도 됩니까.” “내레 (김일성) 배지, 안 달고 다녀도 돼.”

북한 사람이 김일성 배지를 달지 않고 있는 건 그해 8월 모스크바대학교 기숙사에서 만난 북한 유학생들 이후 두 번째였다. 글쓴이는 아직도 이 아무개 기자가 왜 자신은 김일성 배지를 달지 않고 다녀도 된다고 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짐작컨대 외국에 나와서까지 김일성 배지를 달고 다녀야 할 정도로 북한 사회가 경직돼 있지 않다는 점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가 끝나고 곧 이어 서울에서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에 이 아무개 기자가 북 측 기자단 일원으로 서울에 왔다.

23일 경기를 앞두고 글쓴이는 부장에게 특별 취재 지시를 받았다. 서울에 온 북 측 기자단 단장 격인 조선중앙통신 논설위원의 관전평을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논설위원은 바로 이 아무개 기자였다. 부장은 글쓴이가 이 아무개 기자와 안면을 튼 사실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베이징에서 얼굴을 익혀 놓았으니 부장의 지시를 제대로 해낼 것으로 생각하고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이 아무개 기자가 경기 전날 스포츠 담당이 아닌, 남 측 기자들과 나눈 대화 가운데 일부 내용이 기사화됐는데 이게 내부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 모양이었다.

이 아무개 기자는 실제 나이보다 좀 더 들어 보였는데 남 측 기자가 그걸 물어보았고 이 아무개 기자는 “내레 사회주의 건설하느라 좀 늙었시요”라고 말한 게 말 그대로 기사화돼 경기 당일 아침 신문에 제법 큰 활자로 보도됐다.

난감해 하는 글쓴이를 보며 이 아무개 기자는 입조심을 해야 한다면서도 한 가지 방책을 내놓았다. 자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릴 터이니 그걸 받아 적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온 북 측 기자 관전평 제목이 ‘남 측, 속도전에서 앞섰다’였다. 남 측의 한 매체가 사전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이 아무개 기자의 20년 만의 서울행과 관련한 기사를 실었지만 관전평만큼은 제대로 된 것이었다. 혼잣말 형식이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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