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1988년 서울 대회에서 플라이급 김광선(사진 가운데)과 라이트미들급 박시헌이, 북한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플라이급 최철수가 금메달을 딴 이후 각각 올림픽 복싱 챔피언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중반의 열기를 뿜고 있던 어느 날 복싱 경기 취재를 나갔던 후배 기자가 메인 프레스센터로 돌아오더니 “선배, 북한 선수 가운데 복싱을 야무지게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공격적인 복싱을 하는 게 아마추어 같지 않고 프로 같아요. 이 녀석 나중에 뭔가 한 건 할 것 같습니다”라며 열변을 토했다.

복싱 2진 기자의 안목을 믿어 달라는 듯 후배 기자는 섀도복싱을 하며 자기가 보고 온 북한 선수를 흉내 내기도 했다.

후배 기자가 말한 북한 선수는 며칠 뒤 플라이급 결승에서 쿠바의 라울 곤살레스를 12-2로 물리치고 남북한을 통틀어, 그때 이후 2018년 현재까지 나오고 있지 않는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후배 기자의 안목을 입증한 북한 선수는 최철수다.

최철수는 이후 북한 프로 복싱 초창기 간판 스타로 자리 잡았다. 북한은 1995년 WBC(세계복싱평의회), 1997년 WBA(세계복싱협회)에 가입하면서 프로 복싱을 시작했다. 최철수는 북한이 국제 무대에 내세운 간판 선수였고 1998년 8월 PABA(범아시아복싱협회) 페더급 챔피언에 올랐다.

1990년대까지 복싱은 남이든 북이든 강했다. 1972년 뮌헨 대회 때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 나선 북한은 사격에서 금메달 1개, 여자 배구와 유도 그리고 레슬링에서 동메달 하나씩을 얻은 가운데 복싱에서 김우길(플라이급)이 은메달을 땄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구영조(밴텀급)가 금메달, 리병욱(라이트플라이급)이 은메달을 목에 거는 등 1970년대에 올림픽 복싱 노메달에 그친 한국을 대신했다.

한국은 1950~60년대 올림픽 복싱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다. 1956년 멜버른 대회 송순천과 1964년 도쿄 대회 정신조(이상 밴텀급),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지용주(라이트플라이급)가 은메달을 차지했고 장규철은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밴텀급에서 동메달을 추가했다.

북한은 한국이 불참한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리병욱(라이트플라이급)이 동메달을 차지해 뮌헨 대회 이후 3개 대회에서 금메달 1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로 아시아 나라 가운데 독보적인 활약상을 보였다. 이 기간 올림픽 복싱에서 메달을 딴 아시아 나라는 북한 외에 태국(풀타랏 파야오, 1976년 몬트리올 대회 라이트플라이급 동메달)뿐이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와 1988년 서울 대회에서 한국 복싱은 판정의 피해도 보고 도움도 받으면서 금메달 3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의 좋은 성적을 거뒀다. 두 대회에 출전하지 않은 북한은 1992년 바르셀로나대회 때 12년 만에 올림픽 무대에 복귀하자마자 복싱에서 금메달 1개와 동메달 1개를 획득했다.

그러나 남북한 복싱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 침체기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남북한 선수 가운데 올림픽 복싱 결승에 오른 선수는 2004년 아테네 대회 김성국(페더급, 북한 은메달)과 2012년 런던 대회 한순철(라이트급, 한국 은메달) 둘뿐이다. 북한의 김은철(라이트플라이급)은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 한국의 조석환(페더급)과 김정주(웰터급)는 2004년 아테네 대회에서 동메달을 기록했다.

아시아에서는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태국 등이 기세를 올리고 가운데 남북한은 복싱 강국의 명맥을 어렵사리 이어 가고 있다.

2018년 현재 올림픽 복싱 아시아 나라 랭킹을 살펴보면 카자흐스탄(10위, 금 7 은 7 동 8) 태국(16위, 금 4 은 4 동 6) 우즈베키스탄(18위, 금 4 은 2 동 ) 한국(19위, 금 3 은 7 동 10) 중국(21위, 금 3 은 3 동 6) 북한(26위, 금 2 은 3 동 3) 일본(28위 금 2 동 3) 순이다.

한반도가 복싱에 강했던 배경에는 일제 강점기 스포츠 활동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조선인) 선수들이 일본인 선수들과 벌이는 경기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항일운동의 하나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복싱 선수들 사이에서는 ‘일본 선수들에게 판정으로는 이기지 못한다. 이판사판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고 한다. 채점에 따르는 판정이 아니라 누가 보기에도 승패가 뚜렷한 KO승이 아니면 일본 선수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얘기였다.

조선인 선수들은 판정의 불리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펀치를 키웠다. 그러나 이에는 판정 핸디캡 문제 말고 또 하나의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 ‘일본인을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두들겨 패 코피를 흘리도록 만들고 쓰러질 때까지 때리는 복싱처럼 통쾌한 스포츠는 없다’는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복싱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열리기 몇 해 전 와세다대학교 권투부가 조선에 원정을 왔다. 이때 와세다대학교 선수 6명은 모두 KO로 졌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어느 경기에서 와세다대학교 선수가 로프에 몰려 ‘샌드백 상태’가 됐다.

그러나 조선인 심판은 그 상황을 로프 다운으로 보지 않고 경기를 이어 갔다. 이런 경우라면 RSC로 경기를 끝내야 했다. 조선인 선수는 상대방이 그로기 상태인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두들겨 팼다.

뒤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가 이 경기를 문제 삼았다. 당시 총독부는 스포츠를 ‘문화 정치’의 하나로 장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조선에서 열리는 일본인 선수와 조선인 선수 의 복싱 경기를 한때 중지시켰다.

타고난 주먹을 바탕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토해 내던 복싱은 한국은 물론 북한도 '3D 종목‘이 됐는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제 무대에서 이렇다 할 성적으로 올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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