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태용 감독이 지난달 18일(현지시간) 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스웨덴과 2018년 러시아월드컵 F조리그 1차전 도중 절박한 표정으로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다.

▲ 신태용 감독이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러시아 로스토프 아레나에서 벌어진 멕시코와 2018년 러시아월드컵 F조리그 2차전 도중 주심의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스포티비뉴스=류재규 기자] 한국의 2018년 러시아월드컵 본선 일정이 끝난 뒤 대한축구협회의 새 국가대표팀 감독 찾기가 한창이다. 김판곤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장이 신태용 감독을 포함한 감독 후보 10명을 추렸다고 밝힌 지난 5일부터 계산해도 열흘이 넘었다.

외신과 국내 축구계의 말을 종합하면 김 위원장은 지난 주 초 유럽으로 출국해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전 레스터시티 감독, 후안 카를로스 오소리오 멕시코대표팀 감독을 비롯한 여러 후보 또는 대리인들과 접촉한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이번 주말 귀국해 위원회를 다시 열고 유럽행 결과를 토대로 1,2,3순위 우선협상 대상자를 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면 축구협회는 이르면 다음달 초 차기 감독을 선임하고, 9월 A매치를 새 감독 체제로 치를 전망이다.

축구협회가 하루빨리 좋은 감독을 뽑아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 이어 정몽규 회장 체제에서 치른 두차례 월드컵에서 실망한 팬의 마음을 달래고, 새 희망을 심어주기 바란다.

그러나 이런 바람과는 달리 새 감독 선임 작업을 진행하는 축구협회를 바라보는 팬의 마음은 편치 않다. 감독 선임 전 반드시 해야할 절차를 건너뛰거나 빼먹고 무엇에 쫓기듯 허둥지둥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대체 왜 이러나하는 의문이 든다.

김판곤 위원장은 취임 후 한국축구의 철학과 방향성, 현대축구의 트렌드 등 가치뿐만 아니라 사람이 아닌 제도를 통한 일 처리라는 시스템을 강조해 왔기에 최근 행보는 더욱 의아하다.

▲ 김판곤 축구협회 국가대표팀감독선임위원장(왼쪽)이 지난 5일 1차 소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첫째, 축구협회가 의도적으로 일의 순서를 비틀어 본질을 흐렸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신태용 감독의 현재 신분과 거취에 관한 문제다.

연임이냐, ‘경질이냐는 판단의 대상이었던 신 감독의 신분은 귀국 후 갑자기 후보로 변했다. 신 감독의 임무 수행에 대한 평가가 생략됐거나,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몽규 회장은 신 감독과 대표팀에 대한 공식 평가가 이뤄지기도 전인 지난 5일 오전 축구회관에서 열린 협회 출입 언론사 축구팀장 간담회에서 사실상 신 감독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정 회장은 "신태용 감독의 전술 실패와 계속된 실험에 대한 비판이 많다. 하지만 신 감독의 실험과 도전정신이 폄훼되는 것 같다. 신 감독이 비난에 굴하지 않고 계속 발전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판곤 위원장은 같은 날 오후 국가대표감독선임소위원회 1차 회의 뒤 신 감독을 포트 폴리오의 한 후보로 여기고, 새 후보자들과 경쟁을 붙이겠다고 밝혀 정 회장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했다. 김 위원장은 “(한국축구가 지향할) 축구철학을 논의했다. 감독에 대한 평가 논의 자체가 힘들었다. 내가 (감독에 대한평가는 보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2차 회의에서 축구협회 테크니컬 스터디 그룹(TSG)을 통해 평가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덧붙였다. 신 감독의 '후보' 자격이 평가에 따른 것이 아닌, 다분히 정략적인 고려에 따른 것임을 스스로 드러냈다. 취임 후 줄곧 시스템에 의한 일처리를 강조해온 김 위원장이 사람의 뜻에 따라 신 감독을 후보로 결정한 것이다.

둘째, 축구협회는 신 감독에 대한 평가를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기피했다.

신 감독에 대한 평가는 축구협회 수뇌부에 대한 평가와 책임론으로 이어진다. 축구협회는, 독일과 조별리그 3차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월드컵 실패 여론이 대세인 상황에서 신 감독에 대한 평가를 보류해버렸다. 신 감독의 모호한 현재 신분은 책임론에서 벗어나고 싶은 축구협회 수뇌부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정 회장은 세계랭킹 1위 독일을 꺾는 파란과 기적”, “심리적 유리천장을 깬 희망”, “여러 국가 축구협회장의 고맙다는 인사등을 강조하면서 신 감독에 대해서는 공도 있고 과도 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공과 과 중 과가 지나치게 부각됐다고 주장했다.

정 회장의 이같은 인식은 신 감독 뿐만 아니라 그가 지휘한 대표팀에 대한 평가, 축구협회 수장인 자신에 대한 평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공과 과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완벽한 성공은 아니지만 실패도 아니며, 실패라고 단정한 뒤 책임을 묻는 팬과 여론의 흐름은 부당하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 신태용 감독(가운데)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카잔에서 벌어진 독일과 2018년 러시아월드컵 F조리그 3차전에서 승리한 뒤 기뻐하고 있다.

셋째, 지난해 11월 홍명보 전무 영입을 핵심으로 하는 축구협회 조직 개편 당시 탄생한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회라는 기구의 본질과 기능에 관한 문제다.

김 위원장이 총괄 책임을 진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회는 산하에 (감독)선임, 테크니컬스터디그룹(TSG), 정보전략, 스포츠과학, 스카우트 등 5개 소위원회를 두고 있다. 이 중 핵심인 (국가대표감독)선임소위원회는 김 위원장을 포함한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

문제는 이들이 국가대표팀 감독 선임이라는 중대사를 책임질 수 있는가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들의 역량이나 인품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고, 축구협회장의 거취가 거론되는 민감한 사안을 불편부당하게 다룰 만한 경륜과 소신을 갖췄느냐에 대한 의문이 문제다. 역대 국가대표팀 감독이나 기술위원장 중 팬의 신망을 받는 몇 사람이라도 소위에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넷째, (감독선임)소위원회의 막강한 권한과 책임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한발 더 나아가 정몽규 회장이 직접 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위원회가 자율성과 권한을 갖고 일을 해야 하지만, 예산 배정과 인사 등 실질적인 결정권은 회장이 행사한다. 유럽과, 그 유럽을 모델로 축구협회를 조직한 일본은 회장이 권한에 따른 책임을 지는 형태로 협회를 운영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축구협회를 본따 조선축구협회를 창립한 한국의 축구협회 조직도 겉모습은 일본과 비슷하지만 실제 운영은 딴판이다.

새삼스럽게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정몽규 회장을 비롯한 역대 축구협회장이 실권을 행사하고도 일이 터지면 책임을 감독과 기술위원장에게 넘기고 자신은 뒤로 숨는 일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잘못된 관행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

다섯째, 신태용 감독을 정몽규 회장 책임론의 발화를 막는 '안전판' 또는 '볼모' 처지에서 이제는 풀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신 감독은 조별리그 뒤 코칭스태프를 비롯한 주변에 연임은 힘들 것이라는 뜻을 이미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을 비롯한 축구협회의 현재 움직임도 사실상 신 감독의 연임 가능성을 배제한 채 외국인 사령탑 찾기에 집중돼 있다.

혹시라도 협회가 외국인 감독 선임에 실패할 경우 신 감독에게 다시 큰 짐을 떠넘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김 위원장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한가닥 기대를 걸고 있는 축구 팬은 물론 신 감독 본인에게도 끔찍한 시나리오다.

▲ 오늘의 파란을 예상이나 했을까? 한국 축구계 인사들이 지난해 12월 1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2018년 러시아월드컵 본선 조추첨식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남일 국가대표팀 코치, 정몽규 축구협회장, 신태용 감독, 차범근 축구협회 부회장, 박지성 축구협회 유스전략본부장.

한 달 넘게 지구촌을 달궜던 2018년 러시아월드컵도 막을 내렸다. 축구공 하나를 쫓아 그라운드를 누볐던 선수, 이들과 함께 환호하고 탄식했던 팬도 달콤하고 쓰라렸던 추억을 가슴 속에 갈무리하고 있다. 선수단을 조직하고 지원했던 각국 축구협회도 월드컵을 통해 얻은 유산과 교훈을 들여다보며 다음 목표를 향해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

러시아월드컵 무대의 주인공 중 하나였던 축구협회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그러나 연극이 끝난 후 무대를 정리하는 광경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은 개운치 않다. 각자의 배역, 부여된 권한과 책임, 짊어진 짐의 무게에 합당한 뒷처리가 투명하고 바르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찜찜한 느낌 때문이다.

월드컵 축구라는 연희판을 정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눈밝은 관객은, 자신들이 연출한 퍼포먼스의 결과에서 애써 눈을 돌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힘들겠지만 객관적으로 드러난 성적표를 겸허하게 수용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조명이 꺼진 컴컴한 무대의 한 켠에서 보일 듯 말 듯 무참하게 서있는 한 사람, 신태용. 그를 이제 '감독 후보'라는 고통스러운 배역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라.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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