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흥민은 짧게는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길게는 2026년 캐나다-멕시코-미국 월드컵(48개국 출전)까지 한국 축구의 기둥이 돼야 한다. 손흥민을 오래도록 보기 위한 적절한 ‘로테이션’이 필요한 시점이다. ⓒ곽혜미 기자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뛰어난 운동선수에게 혹사는 필연적으로 따라붙는다. 요즘 사례로는 축구 선수 손흥민과 배구 선수 김연경이 대표적이다. 은퇴한 축구 선수 박지성도 혹사의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다. 

손흥민 혹사와 관련해서는 국내 팬들은 물론 외신들까지 관심을 보이며 걱정하기까지 한다. 

손흥민은 지난 5월부터 4개월여 동안 운동을 하지 않는 일반인에게도 버거운 일정을 보냈다. 오고간 나라가 영국과 한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미국 인도네시아 등 6개나 되고 이동 거리는 지구를 두 바퀴 돈 정도에 이른다. 이 기간 19경기를 뛰었으니 닷새에 한 번꼴로 경기를 치른 셈이다. 

그런데 손흥민은 20대 초반부터 이런 살인적인 일정에 시달리고 있다. 2016년에는 5월 중순부터 9월초까지 지구 2.3바퀴 정도 거리를 이동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일이 있었다. 

2009년 나이지리아에서 열린 FIFA(국제축구연맹) 17세 이하 월드컵에서 득점 공동 3위(3골)에 오르는 골 결정력은 물론 뛰어난 개인기와 스피드로 유럽 축구 관계자들 눈길을 단숨에 끈 손흥민이 아직 20살이 되지 않았을 때인 2011년에 벌어진 일이다. 

손흥민이 그해 10월 국내에서 열린 폴란드와 평가전, 아랍에미리트연합과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가는 길에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 씨가 기자들 앞에서 대표 팀 코칭스태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칭스태프와 통화에서 손 씨는 "아들의 실력이 아직 국가 대표 수준이 아니니 뽑지 말았으면 좋겠다. 소속 팀에서 자리를 잡고 국가 대표 팀에서 풀타임을 뛸 정도가 됐을 때 합류하면 좋겠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손흥민을 키운 아버지이자 누구보다 아들의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는 축구 스승으로서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 특유의 부정(父情)도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때 상황을 좀 더 살펴보자. 당시 손흥민의 소속 클럽인 함부르크 SV는 현지 시간 10월 3일 샬케 04와 분데스 리가 2011~12 시즌 8라운드를 치렀다. 전반 38분 믈라덴 페트리치가 동점 골을 넣었으나 전반 13분과 후반 28분 클라스 얀 훈텔라르에게 선제골과 결승 골을 내주고 1-2로 졌다. 손흥민은 후반 20분 파울로 게레로와 교체 투입돼 25 분여 뛰었다. 그리고 곧바로 귀국길에 올라 4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7일 폴란드전 후반 시작과 함께 이동국과 교체 투입됐고 11일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 아랍에미리트연합과 경기에서는 후반 27분 지동원과 교체 투입됐다. 두 경기 합쳐 60여분 그라운드를 누볐다. 쿼터제로 치면 3쿼터 정도 뛴 셈이다. 

이 정도 시간을 뛰게 하려고 20살이 안된 선수를 그 먼 유럽에서 한국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12일 출국한 손흥민은 ‘당연히’ 이후 분데스 리가 일정을 치렀다. 그 시즌 리가에서만 27경기(5골)에 나섰다. 
▲ 손흥민과 같은 나이 때 차범근(왼쪽)은 프로 데뷔 이후에는 국가 대표 팀 선수로 딱 3경기(1986년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 불가리아 이탈리아전)만 뛰었다. ⓒ한국 축구 100년사

여기서 잠시 손흥민과 같은 나이에 급성장하고 있던 차범근의 활약상을 살펴본다. 

차범근은 2011년 손흥민과 같은 19살 때인 1972년 4월 방콕에서 열린 제14회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한국은 결승에서 이스라엘에 0-1로 져 준우승했다. 이스라엘은 1980년대 초반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들에 의해 밀려나기 전까지 축구와 농구를 비롯한 모든 스포츠 활동을 아시아 지역에서 하고 있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6경기를 치렀고 당연히 차범근은 모든 경기에 주전으로 뛰었다. 

청소년 수준을 넘어서는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던 차범근은 이 대회 직후 곧바로 국가 대표 팀에 뽑혀 한 달 뒤인 5월 같은 곳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아시안컵)에 이세연 김호 김호곤 이차만 이회택 박이천 김진국 등 선배들과 함께 출전했다. 

차범근은 이 대회 크메르(오늘날 캄보디아)와 경기에서 4-1로 이길 때 박수덕과 이회택에 이어 3번째 골을 넣어 A매치 첫 골을 기록했다. 이 대회 결승에서 한국은 연장 접전 끝에 이란에 1-2로 져 준우승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4경기를 가졌다. 

차범근은 이어 6월 2일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에서 펠레가 뛴 브라질의 산토스와 치른 친선경기에 나섰다. 한국은 이회택과 차범근이 골을 넣으면 분전했으나 산토스에 2-3으로 졌다. 차범근은 7월 12일 쿠알라룸프르에서 막을 올린 제16회 메르데카배국제축구대회에 또다시 출전했다. 차범근은 말레이시아와 치른 결승에서 하프라인부터 단독 질주해 2-1 승리를 확정하는 결승 골을 터뜨렸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7경기를 치렀다. 

이어 9월 14일 도쿄에서 벌어진 제1회 한일정기전에 나섰다. 이 경기는 2-2로 비겼다. 그리고 곧바로 20일 개막한 제2회 박대통령쟁탈아시아축구대회에 출전했다. 한국은 이 대회 준결승에서 버마(오늘날 미얀마)에 0-1로 져 3위 결정전으로 밀린 뒤 인도네시아를 3-1로 꺾었다. 차범근은 태국과 개막전에서 골을 넣었다. 10월에는 서울에서 호주와 두 차례 평가전을 치러 1무1패를 기록했다. 

11월에는 방콕에서 열린 킹스컵에 나섰다. 한국은 싱가포르와 공동 3위를 했는데 차범근은 인도네시아전에서 골을 넣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5경기를 치렀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해 1월에 한 차례, 3월에 4차례 국가 대표 팀과 청소년 대표 팀 평가전이 부산과 대전, 광주, 전주 등지에서 있었다. 이때 차범근은 청소년 대표 팀 소속이었다. 그 무렵에는 외국 팀을 불러서 평가전을 치를 만한 경제적 여건이 되지 못해서 연령대별 또는 국가 대표 1, 2진간 평가전이 자주 있었다. 차범근은 그해 고려대 1학년으로 각종 국내 대회에도 출전했다. 

얼핏 계산해도 분데스리가 정규 시즌보다 많은 경기를 1972년 한 해 동안 뛰었다. 

그런데 차범근이 아주 잠시 몸담았던 SV 다름슈타트를 거쳐 아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에르 레버쿠젠에서 10시즌 308경기(98골, 모두 필드 골)를 뛰는 동안 국가 대표 팀에 소집된 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딱 한번뿐이다. 그것도 요즘 시각으로는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대표 팀 선발 찬반 양론 끝에. 

19살 때 이후, 특히 프로에 데뷔한 이후 차범근과 손흥민은 혹사 문제와 관련해 아주 다른 길을 걸었고,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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