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8년 12월 방콕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경기대회 사격 속사권총에서 은메달을 딴 서길산(오른쪽)은 금메달리스트 박종길(한국, 가운데)의 악수 요청을 거부했다. ⓒ대한체육회 70년사
▲ 40년의 시간이 흘러 2018년 9월 창원에서 열린 제5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에 북한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한 1970년대 북한 사격(권총) 영웅 서길산은 “판문점 선언이 빨리 이행돼 통일된 조국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는 말을 남기고 22일 평양으로 돌아갔다. 40년 사이 서길산 단장의 달라진 언행은 변화하는 남북 관계를 나타낸다. ⓒ연합뉴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제52회 창원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오는 14일 막을 내린다. 사격 세계선수권대회는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 가운데 축구(통칭 월드컵) 육상 수영 탁구 등과 함께 꽤 큰 규모에 든다.

역사도 오래됐다. 제1회 대회가 1897년 리옹(프랑스)에서 열렸다. 1891년 런던(영국)에서 제1회 대회가 열린 역도에는 뒤지지만 1926년 런던에서 제1회 대회가 벌어진 탁구보다 훨씬 앞서고 1930년 우루과이가 첫 대회를 개최한 축구, 1973년 베오그라드(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 창설 대회가 펼쳐진 수영보다 역사가 깊다. 


이번 대회에는 역대 최다인 91개국 4,255명(선수 3,417명 임원 838명)이 참가했다. 1982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9회 아시안게임 출전 선수가 4,595명이었다. 

한국은 1988년 서울에서 여름철 올림픽, 2018년 평창에서 겨울철 올림픽을 열었고 1986년 서울에서, 2002년 부산에서, 2014년 인천에서 여름철 아시안게임을 개최했다. 1999년에는 강원 겨울철 아시안게임을 치렀다. 2003년과 2015년 각각 대구와 광주에서 여름철 유니버시아드를 열었고 1997년에는 무주-전주에서 겨울철 유니버시아드를 개최했다. 

한국은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태릉에서 연 것을 비롯해 2002년 세계축구선수권대회(월드컵) 등 여러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를 치렀다. 2019년에는 광주에서 세계수영선수권대회, 2020년에는 부산에서 세계탁구(단체전)선수권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런 굵직굵직한 스포츠 행사가 줄지어 열리다 보니 비 인기 종목이나 청소년 세계선수권대회는 스포츠 팬들 눈에 띄지 않는다. 게다가 이번 대회는 일정이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끝 무렵과 겹치기도 했다. 

또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전부터 인기 종목인 야구 축구 대표 선수 선발 문제로 스포츠 팬들 눈과 귀가 그쪽으로 쏠렸고 대회가 끝난 뒤에도 여파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또 축구는 아시안게임이 끝나자 마자 국가 대표 팀 평가전이 잇따라 열려 야심 차게 대회를 유치한 창원시로서는 다소간 힘이 빠질 듯하다.

대회 유치가 2012년 4월 이뤄졌고 이 무렵까지만 해도 제18회 아시안게임은 2019년에 열리는 것으로 돼 있었다. 이후 개최 도시가 하노이(베트남)에서 자카르타 팔렘방으로 바뀌고 개최 연도가 2018년으로 변경되면서 창원시로서는 맥이 빠지는 상황이 됐다. 

한국은 대회가 종반에 접어든 11일 현재 금메달 6개와 은메달 3개 동메달 7개로 중국(금 9 은 9 동 2)과 러시아(금 8 은 8 동 9)에 이어 3위에 올라 있다. 함께 열리고 있는 주니어부에서는 금메달 4개와 은메달 7개 동메달 1개로 중국(금 9 은 4 동 4) 인도(금 5 은 5 동 6) 이탈리아(금 5 은 1 동 3)에 이어 4위를 달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폐막을 이틀 앞둔 12일 북한 선수단이 평양으로 돌아갔다. 1970~80년대 북한 사격의 영웅 서길산이 이끈 북한은 11일 현재 은메달 2개와 동메달 2개로 크로아티아(은 2 동 3)에 이어 22위에 랭크됐다. 메달 숫자는 변함없고 순위만 바뀔 가능성이 있는데 2014년 그라나다(스페인) 대회 동메달 1개보다는 향상된 성적을 올렸다.

북한식 영어 표기(So Gil San)로 한때 소길산으로 알려졌던 서길산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권총 개인전 금메달 4개와 단체전 금메달 3개 등 아시안게임 단일 대회 최다인 7개의 금메달을 차지했다. 은메달 1개도 보탰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사격(소총 엎드려쏴) 금메달리스트인 리호준과 함께 북한의 사격 영웅으로 불리는 서길산은 그러나 1978년 제8회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의 명사수 박종길에게 쓰라린 패배를 했다. 

진종오의 대선배인 박종길은 세계 무대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지만 아시아에서는 최고의 명사수였다. 

박종길은 1978년 방콕 대회 속사권총, 1982년 뉴델리 대회 스탠다드 권총, 1986년 서울 대회 속사권총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아시안게임 3연속 금메달이라는, 당시에는 흔치 않은 기록을 세웠다. 개인전 2연속 금메달도 당시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78년 방콕 대회 속사권총 금메달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대회 신기록인데다 한국 선수단이 기록한 사격 종목의 유일한 금메달이었다. 북한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6개나 획득했다. 사격 종목 닷새째까지 금메달이 나오지 않아 노심초사하던 사격 대표 팀은 박종길의 금메달로 큰 짐을 덜 수 있었다. 

시상대에 선 박종길은 은메달리스트인 북한의 서길산에게 악수를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서길산은 앞에 나온 대로 그 무렵 북한 사격 권총 종목의 주전 선수였다. 아시아에서는 박종길과 치열하게 경쟁했고 1976년 몬트리올, 1980년 모스크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했다.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50m 권총에서 4위에 오르며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력을 보였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25m 속사권총에서는 박종길과 공동 15위를 기록했다. 

국제 대회에서 자주 만나 낯이 익은 박종길이 내민 손을 거절한 서길산의 속마음은 지금도 그렇고. 그때에도 그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은메달에 그쳐 속이 상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치열하게 체제 경쟁을 했던 당시 남북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 장면이기도 했다. 

그런 서길산이 이번 대회 북한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했고 “판문점 선언이 빨리 이행돼 통일된 조국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세월도 많이 흘렀고 남북간 격차와 함께 남북 관계도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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