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1988년 제24회 여름철 올림픽 개최 도시로 서울을 발표하자 박영수 서울시장이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하고 있다. 왼쪽이 유치단을 진두지휘한 정주영 현대 그룹 회장, 오른쪽이 조상호 KOC 위원장.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대표단의 활동은 KOC, 재계, 백의종군한 박종규 전 KOC 위원장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 KOC의 체육인 중심 멤버는 조상호 KOC 위원장을 비롯해 전상진 부위원장, 최만립 명예 총무,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등으로 이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어 국제 스포츠계 인사들을 접촉하는 데 불편이 없었고 유용한 정보 수집은 물론 실질적인 득표에도 큰 성과를 올렸다.

일본이 방심하며 등한시했던 1981년 7월 11일 카라카스 범미주올림픽연합회 총회와 7월 21일 밀라노 ANOC 총회를 공략한 바 있는 전상진 부위원장과 김운용 총재는 바덴바덴 입성에 앞서 선발대로 유럽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현지 IOC 위원은 물론 체육계, 정부 인사들과 접촉하고 서울 지지를 호소했다.

바덴바덴에 여장을 푼 다음 날 저녁 조상호 위원장은 바덴바덴 시내 브랜너스 파크호텔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을 예방하고 서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IOC 수뇌부 인사들을 설득하는 데 주력했다. 또 9월 25일에는 서아시아 스포츠계의 실력자인 셰이크 파드 쿠웨이트 NOC 위원장과 요담하고 서아시아 지역 IOC 위원들의 서울 지지를 호소했다.

​이밖에도 전상진 부위원장과 최만립 명예 총무는 9월 23일 쿠르하우스에서 열린 서독 대통령 주최 리셉션과 28일 바덴바덴 시장이 주최한 만찬 등 각종 공식, 비공식 모임을 누비며 서울 지지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KOC의 이 같은 활동은 서서히 효과를 나타냈다. 9월 28일 전상진 부위원장이 주최한 스페인어권 대표들을 위한 리셉션에 남미 출신 IOC 위원 전원과 포르투갈 IOC 위원 등 50여 명의 IOC 위원들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뤘다.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던 김세원 전 KOC 부위원장은 정부 훈령으로 급거 유치단에 합류해 노르웨이 대사 시절 친분을 가졌던 스타우보 IOC 위원을 자주 만나 북한을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두 번째로는 재벌 총수들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정주영 현대 그룹 회장은 유치단의 총책임자답게 경제인, 외교관, 체육인 등 다양한 계층의 구성원을 원만히 이끌면서 진두지휘했다. 큰 행사 때면 으레 따르는 경비 문제를 비롯해 잡다한 불협화음을 일거에 잠재우고 혼연일체를 이뤄 유치단이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도록 제반 환경을 마련했다. 영어에 능통한 유창순 무역협회장은 정주영 회장과 콤비를 이뤄 유럽 지역 IOC 위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국의 엑세터 IOC 위원과 서독의 바이츠 IOC 위원을 집중적으로 포섭했다.

최원석 동아 그룹 회장은 스웨덴의 칼그렌 IOC 위원과 에릭슨 위원을 서울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였고 프랑스의 두 IOC 위원을 맡은 조중훈 한진 그룹 회장은 엘조그 위원이 개인 사정으로 바덴바덴 도착이 늦어지자 직접 파리로 달려가 데려오는 열의를 보였다. 또 김우중 대우 그룹 회장은 수단의 할림 IOC 위원 등 아프리카 공략에 앞장섰고 배종렬 한양주택 회장은 튀니지 IOC 위원을 책임 맡았다. 이같이 재계의 거물급 인사들은 해외 진출 기지를 거점으로 많은 IOC 위원들을 서울 지지 세력으로 끌어 모으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박종규 전 KOC 위원장의 활약상을 빼놓을 수 없다. 박종규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림픽 유치의 큰 꿈을 이야기한 주인공으로 당시 국내의 정치적 상황으로 국내외 활동이 금지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박종규는 오랜 친분 관계인 스케스 라냐 ANOC 회장과 국제 스포츠계의 막후 최고 실력자인 아디다스 다슬러 사장의 지원에 초점을 맞춰 이들을 내세운 공산권 표 획득에 힘을 기울였다.

바스케스 라냐 회장은 박종규와 인연으로 일찌감치 남미 지역을 비롯한 많은 IOC 위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다슬러 사장은 또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당시 세계 스포츠 용품 업계를 장악하고 있던 다슬러는 사업적 측면에서 중요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슬러는 만약 나고야가 올림픽을 유치할 경우 급성장하고 있는 일본의 스포츠 용품 업체들이 아디다스의 경쟁사로 나고야 올림픽의 스포츠 용품 공급자로 선택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된 것이다.

IOC 총회를 하루 앞둔 1981년 9월 29일 IOC 위원들의 ‘표심’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올림픽 유치 도시의 제안 연설이 쿠르하우스에서 열렸다. 제안 연설에 나선 서울과 나고야의 자세는 크게 달랐다. 이때까지도 올림픽 유치를 낙관하고 있던 나고야는 이날의 제안 연설을 하나의 통과 의례 정도로 생각했는지 큰 비중을 두지 않은 데 반해 서울은 사활을 걸다시피 철저한 준비를 했다.

​서울 유치단은 제안 연설 뒤 있은 질의 응답에 대비한 150여 개 항의 예상 질문을 놓고 여러 차례 토론과 답변을 거듭하는 맹훈련을 했다.

나고야에 이어 서울 유치단은 81명의 IOC 위원과 국제 경기 연맹 회장단이 참석한 가운데 이날 오후 2시 시작된 제안 연설에서 박영수 서울시장의 간단한 인사에 뒤이어 조상호 KOC 위원장이 유창한 영어로 서울 개최의 타당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제안 연설과 함께 한국의 발전상과 현대 도시의 면모를 갖춘 서울시의 올림픽 준비 과정을 은 짜임새 있는 영상물을 16분간 상영했고 뒤이어 IOC 위원과 국제 경기 연맹 회장들의 질문을 받았다.

질문에 나선 13명의 IOC 위원들과 국제 경기 연맹 회장들은 선수단의 안전 문제와 경기 시설, 숙박 시설, 교통 문제 등을 물었고 소련의 국제체조연맹 티토프 회장은 일본을 대변하듯 한국의 취약점인 경제 문제를 꼬집었다. 경제 문제에 대한 답변에 나선 유창순 무역협회장은 "1988년이 되면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한 일본의 경제력보다 한국이 훨씬 앞설 것이"라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질문을 무색하게 했다. 제안 연설이 끝난 후 서울 유치단의 준비가 완벽했다는 찬사와 더불어 서울이 나고야를 추월할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분위기가 감지됐다.

이날로 유치 활동의 막을 내린 대표단은 정주영, 조상호, 박종규 등 수뇌부 회동에서 서울의 승리를 어느 정도 확신하면서 45표 내외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9월 30일 오후 2시 IOC 위원들은 서울과 나고야 가운데 어느 한 곳을 선택하기 위해 쿠르하우스 회의실에 입장했고 그로부터 1시간 40분 뒤 사마란치 위원장이 투표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속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들더니 ‘쎄울 52, 나고야 27’이라고 발표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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