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9회 전국체육대회 기계체조 여고부 3관왕에 오른 여서정 ⓒ연합뉴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2014년 6월 박지성은 영국 BBC와 인터뷰에서 “한국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순간이 언젠가는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때 글쓴이도 이에 동감했다. 스포츠 기자 생활을 하면서 꿈은 이뤄진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경험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니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스포츠 팬들은 1984년 사라예보(당시 유고슬라비아)대회와 1988년 캘거리 대회 2연속 올림픽 챔피언 카타리나 비트(당시 동독)와 19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옥사나 바이울(우크라이나) 같은 ‘빙판 위 요정’을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나 저런 선수들을 응원할 수 있을까”라고 절망에 가까운 소원을 했던 스포츠 팬들은 2010년 2월 26일 밴쿠버 퍼시픽 콜로세움 링크에서 꿈이 아닌 현실과 마주했다.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김연아는 꿈 속의 요정이 아닌 현실의 요정이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수영 남자 400m 금메달리스트 박태환도,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도 꿈을 현실로 바꿨다. 

1년 9개월여 뒤 스포츠 팬들은 다시 한번 더 꿈이 현실이 되는 장면을 보게 될지 모른다. 장소는 2020년 도쿄 올림픽 체조 경기장이다. 

주인공은 18일 막을 내린 제99회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 여자 고등부 기계체조 3관왕에 오른 여서정이다. 여서정은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뜀틀을 비롯해 단체전 금메달과 마루운동에서 우승했다. 개인 종합에서는 은메달을 차지했다. 

경기체고 1학년인 여서정은 전국체전 데뷔전에서 아시아 무대에서 증명한 자신의 기량을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14일 열린 뜀틀 경기에서 여서정은 1, 2차 시기 평균 14.038점으로 2위 함미주(12.900점, 경기체고)와 3위 양세미(12.650점, 남녕고)를 여유 있게 따돌렸다. 1차 시기에서 14.550점을 따며 사실상 우승을 확정한 뒤 2차 시기에서는 난도를 낮춰 13.525점을 획득했다. 

1, 2차 시기를 통틀어 14점대는 물론 13점대를 기록한 선수는 여서정이 유일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지만 기량은 2, 3학년 상급생들을 압도했다. 

여서정은 이어진 마루운동에서 13.000점으로 개인 종합 우승자인 엄도현(12.375점, 경기체고)을 제치고 금메달을 추가했다. 

여서정은 이제 제48회 세계기계체조선수권대회(10월 25일~11월 3일, 카타르 도하)를 준비한다. 여서정은 3관왕이 된 뒤 스포티비뉴스와 인터뷰에서 “계선수권대회는 아시안게임보다 더 많은 나라 선수가 나오지 않나요. 실력자들 또한 많이 나온다”며 “안 다치고 왔으면 좋겠다”고 세계선수권대회에 나서는 각오를 밝혔다. 

직전 대회인 2017년 몬트리올(캐나다) 대회 여자부 개인 종합에서는 모건 허드(미국)가 정상에 올랐다. 여서정의 주 종목인 뜀틀에서는 마리아 파세카(러시아)가 1위를 차지했는데 중국의 왕얀이 7위, 일본의 미야카와 사에가 8위를 기록했다. 

2014년 난징 유스 올림픽 뜀틀 금메달리스트인 왕얀과 같은 대회 같은 종목 동메달리스트인 미야카와는 1999년생으로 2002년생인 여서정과 도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겨룰 가능성이 크다. 

여서정이 자카르타 팔렘방 대회에서 1986년 서울 대회 서선앵(평균대)과 서연희(이단평행봉) 이후 32년 만에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기록했을 정도이니 한국 여자 체조의 세계선수권대회 성적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북한은 1991년 미니애폴리스(미국)에서 열린 제26회 세계선수권대회 이단평행봉에서 김광숙이 10점 만점 연기를 펼치며 금메달을 딴 적이 있다. 

이 대회에서 유옥렬이 남자 뜀틀 금메달을 차지했다. 여서정의 아버지 여홍철 경희대 교수는 1994년 브리즈번(호주) 세계선수권대회와 1996년 산후안(푸에르토리코) 세계선수권대회 뜀틀에서 각각 동메달과 은메달을 획득했다. 

여서정이 도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일정 수준 이상 성적을 올리면 다음 목표는 곧바로 도쿄 올림픽이다. 

한국 여자 체조는 1960년 로마 대회 때 유명자가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고 1964년 도쿄 올림픽에는 정봉순 이덕분 최영숙이 나섰으나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부터 올림픽 기계체조 종목에 출전한 일본은 도쿄 대회 때 이미 세계적인 기계체조 강국에 올라 금메달 5개와 은메달 4개, 동메달 1개를 차지해 소련(금 4 은 10 동 5)을 제치고 이 종목 1위에 올랐다.

그때 이후 한국 여자 체조는 앞서 나온 피겨스케이팅처럼 베라 차슬라브스카(체코슬로바키아) 올가 코르부트(러시아) 나디아 코마네치(루마니아) 매리 루 르턴(미국) 에카테리나 자보(루마니아) 등 매트 위 요정들의 연기를 부러운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뜀틀에서 북한의 홍은정이 펼치는 금메달 연기도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우리도 할 수 있을 텐데…”라는 기대감을 갖고.

여서정이 있기에 이제 그런 기대감을 키울 수 있게 됐다. 좋은 기록을 세울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도움닫기를 하는 한국 여자 체조 선수를 올림픽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포츠 팬들은 행복할 것이다.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