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우홍 전 MBC 청룡·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4일 잠실 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시구하고 있다. [스포티비뉴스=잠실, 한희재 기자]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두산 베어스와 SK 와이번스의 2018년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리기 직전 스포티비뉴스 사진팀 한희재 기자가 출고한 사진에서 3년여 만에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시구자로 나선 어우홍 전 MBC 청룡·롯데 자이언츠 감독이었다.

어우홍 감독은 중·장년 팬들에게는 프로 지도자보다는 1982년 서울과 인천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끈 사령탑으로 더 익숙하다. 이 대회 우승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지난 1일 자 ‘김재박, 세계 최고 유격수로 인정받다’ 기사 참조.

글쓴이는 3년 전 여름 잡지사 원고 때문에 은퇴 생활을 하고 있는 어우홍 감독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1980년대 후반 롯데 지휘봉을 잡고 있을 때 이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때 노(老) 감독은 글쓴이를 만나자 마자 당구 얘기부터 꺼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통화할 때 골프 얘기를 하곤 했지. 그런데 요즘은 골프는 치지 않고 당구를 쳐요. 동네 복지관에 있는 당구대를 이용하는데 최근 300점에서 400점으로 점수를 올렸어. 동네 대회이긴 하지만 한 차례 우승도 했고.”

1931년생, 우리나라 나이로 85살(올해 88살)에 당구 점수를 올리다니. 그 나이에도 야구 선수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없나 보다. 야구인들 가운데에는 김재박 전 현대 유니콘스·LG 트윈스 감독 등 당구 고수가 꽤 있다.

앞서 얘기했듯이 어우홍=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감독인데 그가 선수 시절 고교 최고 수준의 투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 같다. 어우홍 감독은 1940년대 후반 당대 최고의 학생 야구 투수로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긴 경남중 장태영, 광주서중 김양중과 명승부를 펼친 뛰어난 투수였다.

당구 얘기가 끝나고 노 감독은 그의 선수 시절을 비롯해 글쓴이가 듣고 싶은 야구 얘기는 뒤로하고 우리나라 복지 제도를 주제로 화제를 이어 갔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늘어나는 의료비를 어떻게 해결했냐 하면, 각종 스포츠 시설을 만들고 체육 활동을 장려하다 보니 국민들 건강이 좋아지고 의료비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거지. 요즘 우리나라도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더군.” 

그러면서 노 감독은 2,500원에 제공하는 복지관 점심 식사를 하고 지인들과 당구를 즐긴 뒤 저녁 무렵 귀가해 오후 6시 30분에 시작하는 KBO 리그 경기를 보는 게 일반적인 일과라고 했다.

화제가 야구를 한참 벗어나면서 글쓴이는 1988년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해 2월 롯데 자이언츠는 괌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그때는 한국에서 괌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어 오사카에서 JAL로 갈아타고 한밤중에 도착했다.

괌에서 나올 때도 한밤중이었는데 미군 공군 기지가 있어 비행기가 한밤중에 이착륙을 한다는 얘기를 어우홍 감독에게 들었다. 전지훈련지에 가면 밤에는 기자들에게 남는 게 시간이다. 선수들은 야간 개인 훈련도 하지만.

1987년 11월 전임 성기영 감독 뒤를 이어 롯데 사령탑에 오른 어우홍 감독과, 그래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야구 얘기는 늘 뒷전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를 넘나드는 어우홍 감독의 상식은 가히 백과사전 수준이었다.

어우홍 감독은 오랜 기간 공기업인 한국전력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야구만 하고 업무는 대충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경리 업무도 봤고 한국전력의 매우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인 검침(檢針)을 관리하는 주임을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1977년, 어우홍 감독의 나이가 40대 중반을 넘어설 무렵 아들딸(2남 1녀)이 학교에 가정 환경 조사서를 제출해야 해야 하는데 아버지 직급을 ‘주임’으로 써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부정부패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것도 좋은데 아이들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얌전하기 그지없는 집사람이 한마디를 하더라고. 그래서 그 나이에 간부 시험을 보기로 했지요.”

어우홍 감독이 시험장에 들어서자 30대 초반 후배 사원들이 “시험 감독하러 오셨냐”고 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때 분위기를 알 만하다. 영어와 일본어에 자신이 있었던 어우홍 감독은 당당히 간부 시험을 통과했다.

“언제 야구를 시작하셨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뒤늦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허허, 다른 얘기만 했네. 일제 시대에 집에 야구 글러브가 있었어요. 형제들과 캐치볼을 하는 정도, 말하자면 동네 야구를 한 거지.”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부산 동래중학교(당시 학제는 중·고등학교 통합 과정) 2학년 때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캐치볼 수준이긴 하지만 야구에 이미 어느 정도 적응돼 있어서 빠르게 기량이 발전했다.

1949년 10월 1일 제3회 전국지구대표중등학교야구쟁패전(꽤 긴 이름인데 황금사자기대회)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에서 개막했다. 이 대회는 장태영이 이끄는 경남중의 3연속 우승이 가장 큰 관심사인 가운데 경남중과 서울 경기중 광주서중 동래중 인천 동산중 대구 능인중 군산중 등 7개 팀이 출전했다.

개막식에 참석한 인사들을 보면 당시 학생 야구가 요즘의 프로 야구보다 더 큰 관심사였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신익희 국회의장(겸 대한체육회장) 임병직 외무부 장관(겸 대한야구협회장) 김효석 내무부 장관 안호상 문교부 장관 이기붕 서울시장 존 무초 주한 미국 대사(현대 한국사에 자주 등장하는 초대 주한 미국 대사) 그리고 주최사인 동아일보 최두선 사장 등이 개막식에 자리를 함께했고 최두선 사장이 시구한 공을 무초 대사가 받았다. 무초 대사도 마크 리퍼트 전 대사만큼이나 야구를 좋아했던 것 같다.

동래중은 이 대회 2회전에서 그해 6월 열린 제4회 청룡기대회 우승 팀인 광주서중을 2-1로 꺾었다. 어우홍과 김양중이 연장 12회까지 투수전을 펼쳤고 동래중은 12회 말 박래용의 스퀴즈번트로 결승점을 뽑았다. 제4회 청룡기대회 결승전에서 연장 11회 접전 끝에 광주서중에 1-2로 져 3연속 우승에 실패해 설욕을 벼르고 있던 경남중으로서는 김이 빠지는 노릇이었다.

동래중은 준결승에서 동산중을 3-0으로 눌렀는데 이 경기에서도 어우홍이 완투했다. 10월 4일 열린 결승전에서 동향의 라이벌 동래중과 경남중이 맞붙었다. 어우홍과 장태영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다. 동래중은 5회 말 선두 타자인 5번 타자 어우홍의 중월 2루타와 이승우 박래용의 적시타를 묶어 3-0으로 앞서갔다.

장태영은 6회 말 어우홍에게 또다시 2루타를 내주고 우익수로 갔고 정만오(프로 야구 초창기에 박기철 김학효 등과 함께 기록원으로 활동)가 마운드에 올랐다. 이후 경남중은 7회 초 1-3으로 따라붙었고 9회 초 무사 만루에서 정상규가 주자 일소 2루타를 때려 4-3으로 역전한 뒤 7-3으로 이겨 이 대회 3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그때 사이드암에 가까운 투구 폼이었는데 은사인 한경렬 선생(장훈의 일본 나니와상고 선배이며 한국인으로 나니와상고 주장을 지냈다)에게 우타자냐 좌타자냐에 따라 투수판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운 게 크게 도움이 됐어.”

이후 어우홍 감독은 동생인 어지홍과 함께 1950년대 성균관대 전성시대를 열었고 해군을 거쳐 1960년 남전(南電, 한국전력 전신)에 입사해 1982년 퇴사할 때까지 오랜 기간 선수와 직원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부산상고와 경남고 감독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60~70년대 부산에서 야구를 배우고, 야구깨나 했다는 이들은 거의 모두 어우홍 감독의 제자라고 보면 된다.

세계야구권수권대회가 끝난 뒤 동아대 감독을 거쳐 1984년 MBC 청룡 사령탑을 맡으면서 프로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됐고 1989년 롯데 감독을 끝으로 40여년의 세월을 보낸 그라운드를 떠났다. 물론 이후에도 은퇴한 야구인들 모임인 일구회 초대 회장, KBO 총재 특별 보좌관 등을 지내며 야구와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날 노 감독은 KBO에 기증할 야구 기술 서적이 100권이 넘는다는 말을 남기고 성큼성큼 귀갓길에 나섰다.

그날 이후 전화로는 이따금 안부 인사를 했지만 오늘은 기사로 노 감독에게 인사말을 전한다.

“좋아하는 야구, 오래오래 볼 수 있도록 건강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KBO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시구자가 아니더라도 여러 행사에 야구계 원로들을 초청해 신세대 팬들에게 소개하는 기회를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때 야구 팬 아버지가 예비 야구 팬 아들에게 “저분은 선수 시절, 이런 기록을 세우셨단다”라고 설명할 수 있도록.

프로 야구 초창기 야구인들은 아마추어와 프로로 갈라져 반목이 심했지만 KBO는 한국시리즈 골든글러브 등 주요 경기와 행사에 야구계 원로들을 초청해 자리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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