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대한체육회는 오는 27일까지 2018년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 최종 후보자에 대한 국민 지지도 조사를 실시한다.

대한체육회는 이에 앞서 지난달 17일부터 지난 8일까지 자체 심의 절차를 거쳐 최종 후보자 6명을 선정했다. 

최종 후보자 6명은 김일(프로 레슬링) 김진호(양궁) 조오련(수영) 황영조(마라톤) 이길용(스포츠 공헌자) 엄홍길(산악)이다. 

2018년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은 선정위원회와 심사 기자단의 정성 평가(70%)와 국민 지지도 조사(30%)를 거쳐 선정하며, 선정된 이는 대한체육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국민 지지도 조사에는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대한체육회는 체육회 홈페이지 팝업 창 또는 2018년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 선정 투표 창에서 조사에 참여한 이 가운데 100명을 추첨해 음료 쿠폰을 선사할 예정이다.

역대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 선정자는 2011년 손기정(마라톤) 김성집(역도) 2013년 서윤복(마라톤) 2014년 민관식(스포츠 행정) 장창선(레슬링) 2015년 양정모(레슬링) 박신자(농구) 김운용(스포츠 행정) 2016년 김연아(피겨스케이팅) 2017년 차범근(축구) 등 10명이다. 

이 기사에서는 산악인인 엄홍길을 빼고 4명의 운동선수와 1명의 체육 기자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김일] 김일은 프로 종목이긴 하지만 1960년대 한국 스포츠를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아마추어 종목이 아직은 아시아 무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프로 레슬러 김일은 프로 복싱 김기수와 함께 스포츠 팬들에게 한국 선수도 얼마든지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선사했다. 스포츠 팬들은 김일이 터뜨리는 박치기에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기도 했다.

1929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난 김일은 씨름판을 휘어잡다가 일본 프로 레슬링의 영웅 역도산을 찾아 195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불법 체류자로 1년간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57년 도쿄의 역도산체육관 문하생 1기로 입문했다.

1963년 세계레슬링협회(WWA) 태그 챔피언, 1964년 북아메리카 태그 챔피언, 1965년 극동 헤비급 챔피언, 1966년 도쿄 올 아시아 태그 챔피언, 1967년 WWA 헤비급 챔피언, 1972년 도쿄 인터내셔널 태그 챔피언에 오르며 맹활약했다. 장영철 천규덕과 함께 한국 프로 레슬링 1세대로 활약하며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박치기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은퇴한 뒤 일본을 오가며 사업을 했으며 1987년부터 과격한 선수 생활의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1994년 영구 귀국해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후배 양성과 프로 레슬링 재건에 힘을 쏟다가 2006년 타계했다. 쇼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 프로 레슬링 선수였지만 어렵고 힘든 시절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4년 국민훈장 석류장, 2000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 

[김진호] 1979년 7월 19일 아침 신문을 펼쳐 든 스포츠 팬들은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국이 이런 종목에서도 세계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가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기사 내용은 김진호가 서베를린에서 열린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30m·50m·60m·70m 그리고 단체전 등 전광왕을 차지했다는 내용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불과 1년여 앞뒀을 때이다.

유력한 올림픽 금메달 후보가 신데렐라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불참으로 양궁은 모스크바 대회에서는 올림픽 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양궁 종목에서는 목표했던 금메달 1개와 동메달 1개가 정확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금메달의 주인공은 애초 예상한 김진호가 아니었다. 

1979년 세계선수권자인 김진호는 0점 실사(失射)를 두 차례나 하는 등 난조를 보이며 2,555점을 기록하며 동메달로 밀렸으나 당시 17살의 여고생 서향순이 침착하게 경기를 펼쳐 2,568점으로 중국의 리링주안을 9점 차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김진호는 1978년 방콕 대회에서 남녀를 포함해 한국 양궁 선수로는 처음으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양궁이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린 첫 번째 주자가 김진호다. 

김진호가 앞장선 한국 양궁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금메달 23개와 은메달 9개, 동메달 7로 2위 미국(금 8 은 5 동 3)과 3위 이탈리아(금 2 은 2 동 3) 등을 압도적인 차이로 따돌리고 올림픽 종목 순위 1위를 달리고 있다.

[황영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은 대회 폐막 전날인 8월 8일까지 11개의 금메달을 따 서울 올림픽(금 12)에 못지않은 성과를 올리며 마지막 금메달에 대한 기대를 마라톤에 걸고 있었다.

황영조는 2시간8분47초의 당시 기준 한국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고 1991년 셰필드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유력한 우승 후보는 아니었다. 이 무렵 세계 수준의 선수들은 2시간 6분대의 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스가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 황영조는 선두 그룹에 끼어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한여름 뜨거운 날씨는 레이스 전부터 기록 경쟁이 아닌 치열한 순위 경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올림픽 주 경기장이 있는 몬주익 언덕을 넘어설 때 황영조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망의 마라톤 금메달이었다. 56년 전 이날 이 시각 바르셀로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를린에서 세계를 휘어잡은 손기정의 울분이 환희로 승화됐다. 황영조는 혼신의 힘을 다해 2시간13분23초의 긴 여정을 마치고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56년 전 가슴에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뛰었던 손기정은 까마득한 후배의 장한 모습을 스탠드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황영조는 2년 뒤 히로시마에서 열린 제12회 아시안게임에서는 2시간11분13초의 기록으로 원폭 투하 장소인 평화공원에 골인해 온 국민에게 한번 더 큰 기쁨을 안겼다.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다 고이치가 황영조를 따라잡지 못하고 은메달에 머물렀던 사실이 뼈아팠던 일본은 지구력이 좋은 하야다 도시유키에게 설욕을 기대했지만 그 역시 황영조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4개월 전인 4월 19일 열린 제98회 보스턴마라톤에서 2시간8분9초를 마크해 당시 한국 최고 기록(김완기, 2시간8분34초)을 25초 앞당기는 한국 최고 기록을 수립한 황영조는 풀코스 완주 6차례 만에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를 제패하는 특별한 기록을 세웠다. 
▲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수영에서 2개 대회 연속 2관왕에 오른 조오련.ⓒ대한체육회 90년사

[조오련] 1980년대 최윤희, 2000년대 박태환을 있게 한 한국 수영의 제1 세대 스타플레이어다. 조오련은 1970년 방콕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안게임 자유형 남자 400m에서 4분20초2, 1500m에서 17분25초7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불과 1년 전인 1969년 제50회 전국체육대회 하계 대회에서 세운 기록을 무려 37초7, 3분9초8이나 앞당긴 놀라운 기록이었다.

조오련은 4년 뒤인 1974년 테헤란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게임에서는 같은 종목에서 각각  4분17초93, 1500m에서 17분18초72의 기록으로 골인해 2개 대회 연속 2관왕에 올랐다. 조오련은 자신의 기록을 각각 2초27, 6초98 앞당긴 대회 신기록까지 세워 2관왕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그 무렵 육상경기에는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포환던지기, 1970년 방콕 대회-1974년 테헤란 대회 금메달)가 있었고 수영에는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 있었다. 

중국이 아시안게임에 데뷔하기 전 수영 종목에서 일본 외 나라 선수가 금메달, 그것도 두 개 대회 연속으로 금메달 2개를 따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조오련은 현역 시절 한국 신기록을 50차례나 세웠다. 은퇴한 뒤에는 1980년 대한해협, 1982년 도버해협을 횡단한 데 이어 2002년 다시 대한해협을 건넜고 2003년에는 한강 700리 종주에 성공했다. 2005년에는 두 아들과 함께 울릉도~독도를 횡단했으며 2008년에는 3·1절을 기념해 독도 33바퀴 헤엄쳐 돌기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조오련은 2009년 8월 4일 타계했다.
▲ 손기정 선생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사싱식 일장기 말살 의거를 일으킨 이길용 선생.ⓒ대한체육회 90년사

[이길용] 한국 스포츠 기자의 표상인 이길용 선생이 손기정의 일장기 말살 의거를 일으켰을 때 전후 사정은 이렇다. 

1936년 8월 25일, 손기정 선생이 베를린 마라톤 올림픽에서 우승한 8월 9일부터 16일이 지난 이날 동아일보 석간에 실린 손기정 사진에서 일장기가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한 곳은 서울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20사단 사령부였다. 그때가 오후 4시쯤이었는데 제20사단 사령부는 재빨리 동아일보에 출두를 명령하고 신문의 발송과 배달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오후 3시쯤이면 인쇄가 끝나 동아일보는 이미 대부분 발송과 배달을 끝난 상태였다.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는 일장기가 말소된 동아일보를 보자 책상을 치며 격노했고 일본 경찰이 동아일보에 들이닥쳤다. 사건 직후 동대문경찰서와 종로경찰서 유치장은 동아일보 사원들로 가득 찼다. 이들 연행자 가운데 일장기 말살 의거의 주요 용의자로 꼽힌 인물은 사진 수정을 가장 먼저 생각해 내고 제안한 체육 주임 기자 이길용, 사회부장 현진건(소설가), 잡지부장 최승만,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 제판 기술자 서영호 다섯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돼 석방됐지만 이들 다섯 명은 40일 동안 풀리지 않은 채 고문에 시달렸다. 고문의 주된 목적은 일장기 말살이 동아일보 창설자 김성수(조선체육회 창립 발기인이자 이사)와 사장 송진우(조선체육회 이사)의 직접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걸 자백시키려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동아일보를 아예 없애 버릴 속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문을 심하게 해도 사실이 아닌 자백을 받아 낼 수는 없었다.

뒷날 이길용 선생의 부인이 밝힌 고문의 참상은 참혹하다.  

“저희 바깥양반은 몸집이 작아 몸무게가 35~36kg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몸은 튼튼해서 그때까지 병이라고는 한번도 앓아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도 종로경찰서의 모진 고문으로 몸이 완전히 상해 버렸습니다. 유치는 40일 동안 계속됐고 그 사이 면회는 한 번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물품을 유치장 안에 들여보내는 차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차입하면 그것과 교체해서 입었던 옷가지들을 받아 낼 수가 있었습니다. 여름이었으니까 속옷과 와이셔츠를 여러 차례 들여보냈지요. 그러면 나오는 와이셔츠는 언제나 피투성이였습니다.” 

동아일보는 8월 29일 자로 무기한 간행 정지 처분을 받았고 이길용 등 다섯 명은 언론계로부터 영구 추방당하는 것을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길용은 종로경찰서에 유치돼 있던 9월 25일 자 사내 처분으로 사직당했다. 풀려난 뒤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는 심해 사사건건 이길용의 언동을 트집 잡아 여러 차례 구속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길용의 곧은 민족정신을 존경하는 마을 유지들이 일본 경찰 눈을 피해 쌀가마와 장작을 보내 이길용의 살림을 돕곤 했다.

이길용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인 1949년 10월 대한체육회 공로상을 받았으며,체육사를 정리해 '체육연감'과 '대한체육사'가 발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나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으며 한국체육기자연맹은 1989년 이길용 체육 기자상을 제정해 해마다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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