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쇼트트랙 국가 대표 주민진이 과거 전명규(사진) 한국체대 교수에게 당했던 폭행 사실을 털어놨다. ⓒ 곽혜미 기자
[스포티비뉴스=박대현 기자] 최근 전현직 선수 입을 통해 불거진 빙상계 폭력은 지도자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해묵은 악습이 쌓이다 폭발한 구조 문제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향해 "용서 못할 사람"이라며 분노한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도 "(성적을 못 내면) 이 판에서 매장시킬거라며 윗분에게 한 시간 넘게 욕설과 손찌검을 당했다"는 피해자로 얼굴이 바뀐다. 

무엇이 뿌리이고 어디가 가지인지 파악하기도 어려운 난맥상, 그게 지금 빙상계다.

눈부신 조명 탓에 그늘이 없는 듯보였다. 허나 말 그대로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그늘은 짙고 넓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간 한국 쇼트트랙 선수가 챙긴 메달은 약 780개. 이 금은동 메달들이 외벽 노릇을 했다. 그래서 그늘이 무대 밖 대중에게 투명하게 비쳐졌다. 빙판 위 얼음처럼 말이다.

쇼트트랙 국가 대표 출신 주민진이 22일 MBC 시사 프로그램 'PD수첩'에서 선수 시절 폭행 당한 사실을 입밖에 냈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그는 전명규 한국체대 교수 이름을 언급했다.

주민진은 "과거 6년 동안 태릉선수촌에 몸 담으면서 전 교수를 지도자로 모셨다. (전 교수에게) 손발로 맞고 머리카락이 빠질 때까지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다. 스케이트 '날 집'으로도 피가 날 때까지 맞았다"고 털어놨다.

주민진을 비롯해 젊은빙상인연대 여준형 대표, 익명을 요구한 수많은 스케이트인이 한목소리로 '가혹한 그날'을 고백했다. 사랑의 매로 포장된 도 넘은 폭력 현장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여 대표는 "여자 선수들은 체벌 현장에서 많이 운다. 그래서 (코치가) 물을 먹여가면서 때렸다. 탈진해서 쓰러질까봐 그렇게 한 거다. 부모님께 스케이트장에서 일을 말할 수도 없다. 상심하실 뿐더러 (말해서 시끄러워지면) 영원히 이 판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 빙상은 약 780개에 이르는 메달 수확으로 효자 종목으로 불렸다. 선수 보는 안목과 선진 훈련법을 도입해 한국을 빙상 강국으로 끌어올린 전 교수에겐 청룡장 훈장이 주어졌다.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으로도 활동했던 전 교수는 한국 빙상계를 꽉 틀어쥔 '얼음 위 대통령'으로 불렸다.

전 교수는 2003년 '자식, 가르치지 말고 코치하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체벌을 옹호한 구절이 눈에 띈다.

"체벌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믿음이다. 체벌을 당해도 믿음이 있으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믿음만 있으면, 죽이든 살리든 난 저 사람만 따라 가면 된다는 믿음이 있으면 그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소득이 올라가고 경기장과 장비가 첨단으로 바뀌었지만 체벌에 관한 인식의 시계는 멈춰 있었다. 체육계가 유독 심했다. 빙상계에 만연한 인지부조화가 젊은 빙상인들 폭로로 이어진 가장 큰 배경이다. 

전 교수에게 권력을 준 건 올림픽 메달이었다. 빙상계를 비롯한 체육계, 더 나아가 한국사회는 무거운 질문과 마주하게 됐다. 체벌과 맞바꾼 메달, 폭력을 수단으로 달성한 목적이 정말 우리가 바라는 성취인지,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내놓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게 폭력 근절 첫단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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