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은수 ⓒ Gettyimages

[스포티비뉴스=조영준 기자] 올 시즌을 마감하는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가 23일 막을 내린 남자 싱글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24일 열리는 갈라쇼를 남겨놓고 있지만 정규 경기는 모두 종료됐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 선수는 남녀 싱글 각각 한 명씩 출전했습니다. 남자 싱글에는 차준환(18, 휘문고)이 출전했고 여자 싱글은 임은수(16, 신현고)가 한국을 대표해 빙판에 섰습니다.

두 선수는 모두 처음 출전한 시니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차준환은 그동안 속을 태웠던 스케이트 부츠가 끝내 말썽을 부렸습니다. 부츠를 몇 번이나 교체했지만 발에 맞지 않았고 이번 대회에서는 쇼트프로그램이 열린 21일 오전 공식 연습에서 무너졌습니다.

부츠 탓으로 결과를 돌리는 것은 얼핏 변명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겨 스케이터에게 '생명'과 같은 부츠가 발에 맞지도 않는 것이 아닌 '무너져내린 상태'라면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대회 남자 싱글 최연소 선수였던 차준환의 19위라는 성적이 매우 아쉬운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무너진 부츠로 제대로된 경기를 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습니다.

올 시즌을 마친 차준환의 우선 과제는 제대로 된 스케이트를 준비하고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 임은수 ⓒ Gettyimages

이제 임은수의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임은수는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이 열린 21일 오전 공식 연습에서 뜻하지 않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링크에서 연습하던 머라이어 벨(23, 미국)의 스케이트날은 임은수의 왼쪽 종아리를 가격했습니다. 이 고통으로 임은수는 긴급 치료를 받았고 쇼트프로그램에 출전해 개인 최고 점수(72.91점)을 받았습니다.

22일 열린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는 클린 경기에 실패했지만 개인 최고 점수인 132.66점을 받았죠. 임은수는 김연아(29) 이후 ISU가 주최하는 국제 대회 여자 싱글에서 총점 200점을 돌파했습니다. 또 김연아 박소연(22, 단국대, 2014년 대회 9위) 최다빈(19, 고려대, 2017년 대회 10위)에 이어 네 번째로 세계선수권대회 '톱10'을 달성했습니다.

나름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지만 그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임은수의 매니지먼트사인 올댓스포츠는 벨의 스케이트날 가격이 고의성이 의심된다고 주장했습니다.

ISU는 21일 이 사건에 대한 공식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ISU는 "영상을 비롯해 현재까지 입수한 증거를 보면 벨이 고의로 임은수에게 피해를 줬다는 증거는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ISU는 "한국과 미국 선수단 관계자를 만나 긴급 회의를 열었다. 양국에게 우호적인 해법을 찾으라고 당부했다"고 전했습니다.

현지 관계자에 따르면 임은수와 벨은 프리스케이팅이 열린 22일 오전 공식 연습이 끝난 뒤 만났다고 밝혔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과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벨은 임은수를 직접 만나 사과의 뜻을 전했습니다.

임은수와 벨은 라파엘 아르투니안(62, 아르메니아) 코치의 지도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 LA 인근에 있는 레이크우드에서 훈련하고 있죠.

▲ 머라이어 벨 ⓒ Gettyimages

벨은 미국 여자 싱글을 대표하는 선수 가운데 한 명이지만 아직 전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적은 없습니다. 2017년과 올해 3위에 오른 것이 최고 성적입니다. 또한 ISU가 주최하는 각종 국제 대회에서도 주니어 시절을 포함해 우승 경험이 없습니다. 2016년 ISU 그랑프리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은메달을 딴 것이 최고 성적입니다.

벨은 2016년부터 아르투니안 코치와 함께 했습니다. 현재 피겨스케이팅 계는 코치와 선수의 이별이 잦은 편입니다. 이들은 3년째 동고동락하고 있고 애슐리 와그너(28, 미국) 다음으로 아르투니안 코치와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 싱글 선수입니다.

임은수는 지난해 4월부터 아르투니안 코치 사단에 합류했습니다. 아르투니안 코치는 예전부터 세계적인 점프 전문가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과거 아사다 마오(29, 일본)가 트리플 악셀 및 점프를 완성하기 위해 아르투니안 코치와 함께 했던 적이 있었죠.

좋은 환경 시스템에서 세계적인 지도자의 조련을 받는 것은 피겨 스케이팅 선수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임은수가 국내 경쟁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시니어 무대에 데뷔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톱10을 달성한 점도 나름 좋은 성과입니다.

그러나 해외 유학을 선택하는 선수들은 텃새 및 문화 차이라는 문제도 직면합니다. 이런 일은 피겨스케이팅은 물론 다른 종목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특히 어린 선수들 같은 경우 이런 일로 마음 고생하는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라파엘 아르투니안 코치(왼쪽)와 애슐리 와그너 ⓒ Gettyimages

올댓스포츠는 훈련지에서도 벨이 지난 몇 개월간 임은수를 괴롭혔다고 밝혔습니다. 연습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폭언도 했다는 것이 임은수 측의 주장입니다.

이런 일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사건이 발생했죠. 현재 이 사건을 확인할 증거는 공식 경기 영상 밖에 없습니다. 문제의 영상을 보면 스케이팅 활주를 하던 벨은 링크를 돌며 천천히 이동하던 임은수 쪽으로 다가갑니다. 순간 임은수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스쳐지나가죠.

영상에서는 벨의 스케이트날에 임은수의 종아리에 찍히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고의를 의심할 만한 부분은 충분히 존재합니다.

우선 스케이트날은 매우 위험합니다. 같은 링크에서 연습할 때 최대한 다른 선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종종 많은 선수들이 같은 링크에서 훈련할 때 의도치 않는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 뒤로 후진할 때나 상대방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그런데 이 영상을 보면 벨은 매우 정직하게 앞으로 질주하고 펜스에 가까이 있던 임은수에게 접근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고가 난 점은 충분히 의도성이 있었다는 의심이 가능합니다. 이 영상을 본 해외 누리꾼 상당수도 "벨의 행동은 충분히 의심을 살만 하다"라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영상을 봤다는 페어 선수 바네사 제임스(프랑스)는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당장 연습을 중단하고 임은수에게 괜찮냐고 했을 것"이라며 벨의 SNS에 댓글을 남겼습니다.

▲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폐회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프랑스의 페어스케이팅 선수 바네사 제임스 ⓒ Gettyimages

미국 선수단 측 관계자는 "고의성은 없었다. 사과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질문에 벨은 외신과 인터뷰에서 짧게 대답했죠. 그는 "해를 끼칠 의도는 절대 없었다. 불행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고의건 혹은 벨 측이 주장하는 대로 실수였다해도 모른 척 지나가며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않은 점은 성숙하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특히 벨은 임은수와 또래가 비슷한 10대 선수가 아니라 여자 싱글 선수로는 노장에 속하는 23살입니다. 벨 측의 "고의가 없었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과연 시니어 5년째인 선수가 그렇게 행동을 한 것이 과연 바른 처사였을까요. 

한국을 대표해 처음 큰 무대에 선 어린 선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점은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선수 간의 문제라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세계선수권대회 같이 큰 무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점은 이 사건과 연관된 관계자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 겨우 16살인 임은수는 비록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지만 김연아 이후 200점을 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링크 안에서 펼쳐지는 경쟁을 위해 무대 밖에서 진행되는 신경전은 피겨스케이팅 계에서 늘 있었던 일입니다. 이 사건 이후 더는 국내 어린 선수가 피해 대상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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