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틀 드러머 걸'의 박찬욱 감독. 제공|(주)왓챠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지난달 20일 열린 '리틀 드러머 걸:감독판' 시사회에서 박찬욱 감독은 "방송인 박찬욱입니다"라는 인사로 좌중을 웃겼다. '박찬욱 감독의 드라마'라는 표현이 아직은 낯설지만, 이제 시작이다. 경계는 이미 희미해졌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6부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이 지난달 29일부터 시청자를 만나고 있다. 이미 지난해 영국 BBC와 미국 AMC에서 전파를 탔지만, 한국에선 재편집을 거친 '리틀 드러머 걸:감독판'이 토종 OTT서비스 왓챠플레이에서 첫 선을 보인다. 방송용은 채널A에서 이날부터 1주일에 1회씩 방송될 예정.

▲ '리틀 드러머 걸' 스틸. 제공|(주)왓챠
스파이소설의 대가 르 카레의 원작을 '제대로' 영상으로 옮기고 싶어 드라마를 연출했을 뿐이라는 박 감독은 '옥자'로 넷플릭스와 손잡은 봉준호 감독을 의식한 것도, 방송인 전업 선언도 아니라 했지만 "극장상영 포기는 '뼈 때리는' 고통"이라고 고백했다.

감독은 처음부터(BBC의 요구로) TV 화면에 꽉 차는 16대9 화면비로 '리틀 드러머 걸'을 만들었다. 스마트폰으로도 영화를 찍었던 박찬욱 감독이지만 이런 화면비는 '공동경비구역JSA'(2000)이후 처음이다. "2.35대1 시네마스코프는 와이드스크린이 아니라 스탠다드"라 주장하던 시네필이 은막이 아닌 TV화면을 끌어안은 건 퍽 의미심장하다.

TV용, 스크린용으로 어찌 콘텐츠를 구분할까. 수많은 콘텐츠가 휴대전화의 작은 화면으로 플레이되는 요즘이다. 이른바 TV용 배우, 스크린용 배우로 연기자를 구분짓는 것조자 무용하다시피 한 다양한 플랫폼의 시대, 배우는 물론 감독이나 스태프마저 사각 화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가 단지 영상의 길이나 형식, 화면 사이즈뿐은 아니지만, 결국 재미있고 의미있는 '이야기'로 승부하는 창작자의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검증된 창작자에게 자유와 편집권을 약속하는 넥플릭스는 극장상영이 제한되는 '가입자 서비스 우선주의'에도 불구, 수많은 영화계의 거장과 스타들을 포섭했다. '하우스 오브 카드' 시리즈를 연출한 데이빗 핀처는 지금의 넷플릭스를 있게 한 공신. 2017년 '옥자'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봉준호 감독도 그 중 하나다.

수년 전만 해도 드라마 감독의 영화 연출, 영화 감독의 영화 연출이 대단한 사건처럼 여겨졌지만 이젠 다르다. 특히 올 들어 영화감독들의 국내 방송가 진출이 봇물처럼 이어지고 있다. 지상파의 오랜 독과점을 깬 케이블 및 종편 드라마의 초강세, 넷플릭스의 약진 속에 경쟁력 있는 콘텐츠의 가치는 더 높아졌다. 이는 자연스레 필름메이커들의 도전을 더욱 가속화했다. 

한 영화관계자는 "영화감독 입장에서는 전체를 보지 못한 채 촬영을 시작하는 드라마 시스템 자체가 곤혹스러운데, 전체 대본 작업이 완료된 상황에서 프로덕션이 이뤄지는 '사전제작' 혹은 '반 사전제작'은 부담을 크게 덜어준다"고 말했다. 달라진 환경 덕에 창작자들이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영역을 넘나들 수 있게 된 셈이다.

▲ '킹덤'의 김성훈 감독. 곽혜미 기자 khm@spotvnews.co.kr
BBC와 손잡은 박찬욱, 넷플릭스와 함께한 봉준호뿐이랴. 넷플릭스 6부작 '킹덤' 시즌1로 저력을 드러낸 김성훈 감독은 '끝까지 간다', '터널' 등의 히트 영화의 연출자다. '킹덤' 시즌2는 김성훈 감독과 함께 '모비딕', '특별시민'의 박인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 '백야행'의 박신우 감독은 최근 OCN 시네마틱 드라마 '트랩'을 연출했다. 예능 연출자로 출발해 '장르 파괴자'나 다름없는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는 '조선명탐정' 시리즈 김석윤 감독은 최근 JTBC '눈이 부시게'로 안방극장에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공개를 앞둔 작품도 여럿이다. 전역한 임시완이 주연을 맡은 다음 OCN 시네마틱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연출은 '사라진 밤'의 이창희 감독이다. 1600만 '극한직업'으로 역대 흥행 2위에 오른 이병헌 감독은 JTBC '멜로가 체질'로 드라마 연출에 도전한다. 지난해 '완벽한 타인'을 선보인 이재규 감독은 친정인 방송국으로 돌아가 JTBC에서 웹툰 '지금 우리 학교는'을 드라마화한다. 가수 겸 배우 아이유(이지은)을 네 명의 감독이 풀어내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페르소나'에는 이경미 임필성 전고운 김종관 등 개성 강한 4편의 영화감독이 참여했다. 연극에서 출발해 영화, 예능을 두루 섭렵한 이야기꾼 장진 감독의 드라마 '별의 도시'도 있다.

▲ '멜로가 체질'을 선보이는 이병헌 감독. 곽혜미 기자 khm@spotvnews.co.kr
드라마와 영화의 시너지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드라마가 시간의 제약 없이 다채로운 캐릭터로 방대한 서사를 선보인다면, 영화는 특정한 타깃이 보고 즐길만한 압축적이고도 강렬한 이야기를 속도감있게 풀어낸다. "영화에서 추구하는 속도감과 몰입도를 유지하면서도 드라마의 장점인 여러 캐릭터로 인한 풍성한 이야기를 담아낼 것"이라는 '트랩' 박신우 감독의 각오는 TV와 영화를 넘나드는 많은 창작자들의 목표가 될 듯하다.

16부 20부를 이어가야 했던 이전과 달리 이젠 드라마 회차나 길이도 이야기에 맞게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원작의 방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그려내고 싶어 드라마를 만든 박찬욱 감독처럼, 창작자들이 하고싶은 이야기에 걸맞은 매체와 플랫폼에서 보다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내놓게 될 가능성도 높아지지 않을까. 한 방송 관계자는 "방송에 어울리는 이야기, 영화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따로 있다. 매체나 플랫폼에 따라 만드는 사람이 결정되는 시대를 지나 이야기에 따라 매체와 플랫폼을 선택하는 시대가 된 셈"이라며 "능력있는 창작자, 힘 있는 콘텐츠의 가치가 더 높아졌다"라고 설명했다.

roky@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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