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기생충'의 이정은. 제공|윌엔터테인먼트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배우 이정은(49)는 '기생충'의 히든카드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두 가족의 삶이 포개지며 벌어지는 예측 불허의 이야기들을 유쾌하게, 슬프게 또 씁쓸하게 그려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올해 칸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영화팬을 사로잡은 화제의 작품.

늘 다음을 예상하기 힘든 독특한 이야기로 평단과 관객을 동시에 사로잡아온 봉준호 감독이지만, 현실을 묘사하면서도 절묘하게 은유해낸 '기생충'은 이전과 궤와 결이 다르다. 특히 잠시 이야기에서 사라졌던 이정은이 새롭게 등장하는 순간부터 '기생충'의 제 2부 막이 열린다. 그녀가 '기생충'의 '히든' 카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 아래 기사 내용에는 영화 '기생충'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영화 '기생충' 레드카펫의 이정은(왼쪽에서 3번째). ⓒ게티이미지 
이름하여 인터뷰 금지령(?)이 풀린 다음날, 삼청동 카페의 멋진 반지하(?)에서 이정은을 만났다.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 참석했으면서도 레드카펫과 공식 포토콜에 참여했을 뿐, 기자회견이나 간담회, 인터뷰에선 그림자도 볼 수 없었덩 그녀와 대면하는 첫 자리다. 지금까지 4번 '기생충'을 관람했다는 이정은은 "이때까지 내용을 유포(!)해선 안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명훈씨는 더 답답했을 거예요. 역할이 현실까지 이어지니까."

극중 국문광의 남편이자 지하실의 '리스펙' 사내로 등장한 배우 박명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존재 자체가 스포일러였던 박명훈의 처지가 더하긴 했다. 프랑스 칸에는 함께 갔지만 내내 카메라와 취재진을 피해 다녀야 했고, 공식상영에서도 혹여 카메라에 잡혀 궁금증이라도 살까 기립박수가 시작되기 전 자리를 떴으니.

"전 칸에 가서 사진도 찍고 했으니 호사를 누린 셈이죠. 스트레스는 없었는데, 남편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있네요."(웃음)

약속이나 한듯 블랙 앤 화이트의 슈트 - 드레스 차림이었던 '기생충' 팀의 레드카펫에서 선보인 이정은의 보라색 드레스는 사실 슈트를 입으려다 드레스코드에 맞춰 준비한 것. 이정은은 "원래 보라색을 좋아한다"며 "평생 한 번 하는 거니 남들도 원색으로 입을 줄 알았는데, 흰 거 까만 걸로 입을 줄은 몰랐다"며 "나 왕따야? 그랬다"며 웃음지었다.

▲ 영화 '기생충'의 배우 이정은. 제공|CJ엔터테인먼트 
과외교사부터 운전기사, 가정부까지… 온 식구가 거짓말로 박사장네 집 일자리를 차지한 백수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에 둔 '기생충'에서 이정은은 박사장네 살림을 도맡아 온 가정부 국문광 역을 맡았다. 백수가족의 작전에 휘말려 직장을 잃은 그녀가 인터폰 화면 너머로 등장하는 순간 '기생충'은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낸다. 그리고 지하실에 숨어 살던 국문광의 남편이 등장하며 완전히 새로운 장이 열린다.

'옥자' 뒷풀이에서 내년 스케줄을 비워두라는 봉 감독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정은은 농담인 줄 알고 넘겼다고. 그런 그녀에게 봉 감독이 한 장의 콘티를 보냈다. '이런 장면이 있는 이상한 이야기를 만들 것'이라는 이야기도 함께. 벽에 두 다리를 붙인 채 바닥과 수평이 돼 힘껏 찬장을 밀고 있는 문광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정은은 "사람에게 돼지 소리를 부탁하니까 미앟나셔서 뭘 또 하나 주시려고 하나 했다"며 "돼지에서 업그레이드 되면 사람이겠지 했는데, 이렇게 캐릭터가 신나고 재밌는 작업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이정은은 '재미있고 이상한 영화'를 해보자던 봉준호 감독의 말을 되짚으며 "그 분이 이상하다고 하는 영화일수록 좋더라"며 "반전이 있는 역할이란 건 찍어가면서 느꼈다"고 털어놨다. 자신의 얼굴에서 반전의 느낌이 나올까 걱정도 했다. "저는 사실 귀엽잖아요.(웃음)"

▲ 영화 '기생충'의 배우 이정은. 제공|CJ엔터테인먼트 
해고신으로 시작된 이정은의 촬영은 곧장 인터폰 장면으로 이어졌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퉁퉁 부은 얼굴에 우비를 입고 나타난 이정은은 "모니터에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며 "조커 연기하던 배우가 찢어진 입에서 침이 새니까 혀를 날름 하는 장면이 나온 것처럼, 현장에서 나온 게 많다. 시선, 눈 같은 게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대본엔 '술에 취한 문광이 상처를 입고'라고 나와 있었어요. 최선을 다해서 예의바르게 설명하는데 두서가 없죠. CCTV는 자기가 끊어놨지만 지금 용기를 내서 얘기하는 거거든요.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과한 소개가 공포감을 줄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가 최선을 다할수록 장르의 붕괴점에 간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전 단순하게 생각한 편이었어요."

'봉테일'이라 불리면서도 배우들이 생각할 여지를 열어두는 건 봉준호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기도 하다. '마더'(2009)에서 피해자의 친척으로 등장, 봉준호 감독과 인연을 맺었던 이정은은 미리 경험한 바다. "같이 한 배우가 '저희가 무슨 친척이에요? 이모예요, 고모예요?'하니 '이모일 수도 있고 고모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셨다"며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했고, 나름대로 무엇이 만들어졌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엉망이 된 문광의 얼굴도 사채업자에게 맞았다고 짐작할 뿐 정해진 건 없었다. "몇 가지 겹쳐지지 않았을까 했어요. 저도 그렇게 쫓겨나면 제정신으로 살 수는 없었을 것 같아요."

예측불허의 스토리, 리드미컬한 장르 변주는 한국은 물론 칸의 관객도 열광시켰다. 계단을 기어 올라가던 국문광이 백수가족의 엄마 충숙(장혜진)의 발차기에 튕겨나가듯 계단을 굴러떨어진 장면에선 칸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한국 관객들 사이에선 탄식이 나온 장면이다.

"아무리도 우리 관객은 좀 심각하게 보시죠. 자국 영화에 대한 동질감도 있을 것이고. 칸의 관객이 보기엔 제3세계 영화나 다름없고 이름도 어려운 문광이잖아요. 거리감이 오히려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아요. 어찌보면 대단히 상업적인데, 아주 유쾌하게 보다가 한 대 맞는 느낌이랄까. 예상 외 반응이었지만 속으로 '불끈' 했달까. '이야기에 빨려들었구나' 싶어 속으로 '으슥' 했어요. 송강호 선배는 '너무너무 좋아하는 걸 처음 본다'고 이야기해주시기도 했고요."

▲ 영화 '기생충'의 배우 이정은. 제공|CJ엔터테인먼트 
이정은은 동갑내기인 봉준호 감독의 연출 스타일에 대해 "전형적인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마디로 답했다. 뻔한 기대를 "변주한다"며 "굉장히 집요한 분"이라고도 했다.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면 편하기도 해요. 전에 했던 방식으로 연기하다보면 상상력이 닫힐 수가 있거든요. 다양성에서 한계가 와요. 그런 부분에서 상상력을 펼칠 수 있게 해주시니까 자기에게서 낯선 얼굴, 예상하지 못한 액팅이 나오게 되는 게 놀라워요. 그만큼 영화에 나오는 인물을 오랫동안 생각하고 준비하시는 것 같아요."

사실 이정은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미혼인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누군가의 아내를, 엄마를, 며느리를 연기하곤 했다. '기생충'에선 바퀴벌레 커플같은 묘한 부부 사이를 연기했고, 화제 속에 종영한 드라마 JTBC '눈이 부시게'에선 안내상의 아내, 한지민의 어머니이자 김혜자의 며느리로 등장해 시청자의 마음을 빼앗기도 했다. 어느덧 캐릭터 속에 쏙 녹아나버린 이정은을 보면 경험 그 이상을 연기하는 배우의 마력에 빠지곤 한다.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사람에겐 결이 있는 것 같아요. 조연을 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게 제 에너지가 같이 있는 사람을 평화롭게 한다거나, 도울 수 있는 분위기가 되는 걸 좋아하거든요. 돌아가신 김영애 선배님과 작품을 할 때였는데 제 역할은 어떤 때는 대사 두마디 하고 넘어가고 그랬어요. 그런데도 배울 수 있는 게 너무 많았어요. 그건 배우로서 지나가야 하는 시간이에요. 그 때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아요. 그 사람과 함께 인생의 얼마를 공유하는 이상한 인연이 맺어질 때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연기를 하는 베이스가 된다면…. 연기를 잘하는 것보다 마음 씀씀이를 다하는 걸 배워가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많이 하라'고 하셨어요. 결혼한 마음으로 살아보고, 이혼할 마음으로 살아보고… 배우는 거죠. 죽어볼 수 었지만 죽는 연기를 해야 하는 것처럼, 주어졌을 때 발회하는 거죠."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 roky@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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