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유현태 기자] 지난 7월 26일은 습도가 95.3%에 달했다. 최고 기온은 섭씨 25.9도로 그리 높지 않았지만 2019년 들어 가장 습한 날이었다. 불과 100미터만 이동해도 줄줄 땀이 흐를 정도였다. 팀 K리그와 유벤투스의 경기 취재를 위해 집을 나선 지 5분 만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아, 집에서 편하게 보고 싶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 도착하니 날씨와 관계없이 기대감으로 북적인다. 흰색과 검은색으로 된 유벤투스의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다수.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7'과 '호날두(RONALDO)'라는 글씨를 등에 달았다. 이탈리아 최고의 명문 구단과 세계 최고의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오긴 오나보다.
경기장 내부 분위기도 생소했다. 평소 '원정석'이라 불리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의 S석엔 유벤투스의 한국 팬들이 걸개를 걸고 카드섹션까지 준비했다. 유벤투스의 응원가가 K리그의 대표 응원가 '내사랑 K리그'가 번갈아 경기장을 울렸다. 장소는 서울이지만 경기장의 일부는 마치 이탈리아 토리노 같았다.
지각한 유벤투스 때문에 1시간이나 늦게 경기가 시작된 뒤에도 분위기는 유벤투스의 것이었다. 팀 K리그는 12개 팀에서 선수들이 모인 연합 팀. 호날두 출전 예고로 티켓마저 불티나듯 팔려나간 상황에서 조직적인 응원을 할 순 없었다. 간간히 들리는 유벤투스 팬들의 목소리만 하나로 모이곤 했다. 그래도 6만 여 팬은 이벤트 경기인 만큼 멋진 플레이를 보이면 팀을 가리지 않고 환호를 쏟아냈다.
하지만 축제 분위기는 슈퍼스타 1명의 배신 때문에 짜게 식었다. 굳은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 있던 호날두는 결국 피치를 밟지 않았다. 팬들의 반응은 환호에서 야유로 바뀌었고, 끝내는 그의 라이벌 리오넬 메시의 이름을 연호했다. 최저 3만 원부터 최고 40만 원짜리 입장권을 구매한 팬들이 6만 명 이상 모였다지만, 1주일 동안 수억 원을 받는 호날두에겐 그리 큰 성의는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한국 팬들은 속이 상할 대로 상했는데 유벤투스와 호날두는 이미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유벤투스는 27일 토리노에 도착한 뒤 짧은 휴식을 받았다. 호날두 역시 귀가해 러닝머신에 오른 상태로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팬들의 환호에 책임감을 느낀 것은 사실상 '원정 팀'이었던 팀 K리그의 선수들이었다. 울산 현대의 미드필더 믹스는 "우리는 K리그를 대표한다는 것에서 압박감을 느끼진 않았지만 매우 흥분됐다. 모든 선수들이 K리그를 대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이것은 정말 큰 영광이다. 우리는 한 번의 태클, 한 번의 질주에 100% 힘을 쏟았다"고 말했다.
팀 K리그가 책임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자신들을 응원하기 위해 찾은 팬들이다. 팀 K리그는 팬들이 직접 뽑아 만든 팀이 아니던가. 킥오프 전 경기장을 돌며 만났던 K리그 팀들의 유니폼을 입은 팬들의 목소리가 선수들에게는 들렸나보다.
FC서울과 수원 삼성의 유니폼을 입고 함께 경기장을 찾은 이다솔, 이건철 씨는 "호날두를 보러 왔다. 선수는 좋아한다지만 팀은 다르다. 당연히 (응원하는 것은) 우리 팀 아닌가. 당연히 K리그가 이기면 좋겠다. 호날두가 3골 넣고 K리그가 4-3으로 이겼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울산 현대의 유니폼을 입고 찾은 장보경 씨도 "호날두를 살아 생전 경기 뛰는 걸 보고 싶어서 왔다"면서도 "울산 선수가 4명이나 뽑혔다. 울산 선수들을 보러 왔다"고 말했다.
수원 타가트의 유니폼을 입은 허진경씨와 대구FC 정승원의 유니폼을 입은 오민지 씨 역시 마찬가지다. 허진경 씨는 어느 선수를 보러 왔냐는 말에 "우린 수원 팬이고 대구 팬이다. 호날두는 유명한 선수라 보고 싶었지만 우리 선수들이 보고 싶어서 왔다. 당연히 팀 K리그가 이기면 좋겠다"며 수원 선수들을 향한 애정을 표현했다. 오민지 씨도 "조현우 활약을 기대하고 있다. 호날두 세리머니를 못하게 한다고 하지 않았나. 제일 고생할 것 같긴 하다"고 말했다.
나란히 이동국 마킹이 된 전북 유니폼을 입은 이태형-고수진 씨도 "이용이 호날두를 막고 이동국이 유벤투스를 상대로 골을 넣는 걸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항상 경기장에서 만나는 한국 팬들에게 멋진 경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 팀 K리그는 바로 그 책임감 때문에 잘 만들어진 3골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K리그 팬들은 물론이고 호날두가 궁금해 경기를 지켜본 팬들까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이제 다시 보지 않을 사이처럼,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호날두는 느끼지 않았을 감정이다.
짝사랑은 힘들다. 한국 팬들이 호날두에게 차갑게 돌아선 이유다. 팬을 아끼지 않는 슈퍼스타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결국 스타를 만드는 것도 팬인데. 호날두는 그 흔한 인사조차 하지 않고 경기장을 떠났다.
사실 우리가 사랑하는 연인, 가족, 친구가 꼭 잘 나가야 할 이유는 없다. 사랑은 결국 관계의 문제 아닌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 충분하다. 지난 6월 인터뷰했던 대구의 수비수 정태욱은 "저희는 이렇게 많이 찾아와주시고 관심을 주시는 데 (사인이나 사진 촬영을) 더 해드리지 못해 미안할 뿐"이라고 말했다. 지구 반대편 최고의 축구를 멀리서 지켜보는 것보다, 항상 만나 울고 웃는 K리그를 사랑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면 지나친 '정신 승리'일까.
스포티비뉴스=유현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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