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원으로 인생 2막에 도전 중인 성은령. 그녀는 "루지 선수 땐 겨울에 항상 해외에 있었다. 겨울인데도 한국에 있을 때 '아 내가 은퇴했구나'라고 실감한다"고 말한다.
[스포티비뉴스=맹봉주 기자 / 제작 한희재·김효은 PD, 김예리 영상 디자이너] “누구든 언제고 은퇴는 하잖아요.”

한국 여자 루지(Luge) 시작에는 성은령(27)이 있다.

루지는 프랑스어로 썰매를 뜻한다. 국내에선 여전히 낯설지만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에서는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동계 스포츠다.

썰매에 누운 채 얼음 트랙을 활주하는 루지는 1964년 인스부르크 대회부터 동계올림픽 정식종목이 됐다. 루지에 사용되는 길이 1.2m, 너비 51cm의 썰매는 최고 시속이 140km까지 나온다.

성은령은 우연한 계기로 썰매를 타게 됐다. 다니던 대학교 교수의 추천으로 루지를 처음 접한 것. 이후 그녀는 한국 최초 여자 루지 선수가 됐다.

늦게 루지를 접했지만 재능이 있었다. 2014 아시아컵 여자 루지 싱글 금메달을 비롯해 2014 소치 올림픽에서 29위, 2018 평창에선 18위를 기록했다.

성은령은 지난해 평창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현재는 스포츠 마케팅 회사 직원으로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근황을 묻는 질문에 성은령은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먹기 싫을 땐 안 먹고...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라는 다소 엉뚱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유가 있다. 루지 선수 시절 항상 음식과 사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성은령은 몸무게 증량을 위해 매일매일 억지로 음식을 먹었다. 루지에서 선수들의 몸무게는 기록 향상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몸무게가 조금이라도 더 나가야 트랙에서 썰매 가속도가 더 붙는다. 체중 1, 2kg 때문에 기록이 달라질 수 있다. 루지 선수들에게 체중 증량은 필수다.

"루지를 하면서 14kg을 찌웠어요. 하루에 몇 끼를 먹었는지 모르겠어요. 루지 선수 생활을 하면서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요. 지금은 많이 빠졌죠. 억지로 안 먹으니까 그냥 빠지더라고요."

▲ 2014 소치 올림픽 때도, 국내에서 열린 2018 평창 올림픽 때도 여자 루지 싱글 국가대표는 성은령이었다.
성은령의 꿈은 평창 올림픽 출전이었다. 국내에서 열리는 올림픽 무대는 힘들 때마다 그녀에게 버팀목이 됐다. 그리고 평창에서 꿈을 이룬 그녀는 미련 없이 썰매에서 내려왔다.

"솔직하게 말하면 루지를 시작하고 매일매일 은퇴를 결심했어요(웃음). 운동 자체가 너무 힘들고 미래에 대한 고민이 컸죠. 훈련 때마다 '이번에 돌아가면 은퇴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늘 마지막이라고 임했던 이런 생각이 오히려 더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 것 같아요."

특별한 계획을 세우고 은퇴를 결심한 건 아니었다. 선수 시절엔 현재를 살기에도 바빴다. 은퇴 후 성은령은 스포츠 직업 박람회를 통해 새로운 삶의 실마리를 찾았다. 직업 설명회에서 지금의 회사를 발견한 것이다. 성은령이 직접 회사에 연락했고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해 최종합격 통보를 받았다.

"은퇴 후 고민이 많았죠. 지도자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어요. 하지만 선수생활을 하면서 다른 일을 준비하기엔 힘들었어요. 그래서 루지를 그만두고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게 뭔지 확실히 찾고 싶었죠. 고민의 시간을 갖다가 지금의 회사를 찾았어요. 직무검사를 통해 마케팅과 제 성격이 맞다는 결과가 나왔거든요. 마케팅 쪽에 도전을 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루지에선 국내 최고지만 회사에서 성은령은 미생이었다. 처음 접하는 회사생활에다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하지만 금세 실력을 인정받았다. 인턴으로 시작했지만, 얼마 전 정직원이 됐다.

"정직원이 되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먼저 제 가치를 알아봐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하지만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하는 걱정도 들었어요. 주변에선 선수생활을 한 게 마케팅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당시엔 와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스포츠 마케팅을 할 때 예전에 제가 경험해봤던 일들이 많이 생각나요. 확실히 선수 때 경험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 성은령은 선수시절을 회상하며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평창 올림픽 마지막 레이스를 꼽았다. "제가 진짜 좋아하는 사진이 있어요. 평창 올림픽 마지막 레이스를 끝내고 손을 불끈 쥔 장면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에 루지를 시작했거든요. 꿈을 이룬 순간이기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아요."
성은령에겐 회사원 말고도 직업이 하나 더 있다. 최근 대한체육회가 주최하는 '2019 찾아가는 운동선수 진로교육'에서 강의를 맡은 것이다. 성은령은 몇 년 전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은퇴 후 인생 2막에 대해 걱정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은퇴를 준비하는 현역 선수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다.

"옛날엔 운동선수들은 운동만 하라고 했잖아요. 운동선수들이 공부하는 것에 부정적이었어요.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요즘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운동도 할 수 없는 환경으로 변했어요. 은퇴를 결심한 선수들이라면, 새로운 진로를 찾는데 도움이 되는 여러 강의나 프로그램을 통해 준비를 했으면 좋겠어요. 운동도 중요하지만 은퇴 후를 대비하는 게 중요해요. 누구나 언제든 은퇴는 하니까요."

끝으로 루지 선수 성은령이 아닌, 회사원 성은령으로서 목표를 물었다.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먼저 회사에 잘 적응하고 싶어요. 인생 목표는 스포츠와 관련된 직업을 갖고 취미로 운동을 하는 거예요. 전자는 이뤄가고 있어요. 이제는 취미로 운동을 하는 삶을 가져야죠."

스포티비뉴스=맹봉주 기자 / 제작 한희재·김효은 PD, 김예리 영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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