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강윤미.
[스포티비뉴스=맹봉주 기자 / 제작 한희재·이충훈 영상기자, 김예리 디자이너] 쇼트트랙 선수에서 회사원을 거쳐 심판과 강사까지.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강윤미(31)가 두 번째 올림픽에 도전한다.

강윤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언니를 따라 쇼트트랙을 처음 접했다. 금세 쇼트트랙 매력에 빠진 그녀는 엄마를 졸라 운동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쇼트트랙 선수로서 그녀의 목표는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의 영향이 컸다.

나가노 동계올림픽은 한국 쇼트트랙이 세계 최강임을 전세계에 알린 쇼케이스나 다름없었다. 한국이 획득한 메달 6개가 모두 쇼트트랙에서 나왔다. 특히 '날 들이밀기'로 0.053초 차 금메달을 딴 김동성, 1994 릴레함메르 대회에 이어 금메달 2개를 목에 건 전이경, 여자 계주 3,000m 2연패 달성 등 지금도 팬들에게 회자되는 장면들이 많이 연출됐다. 강윤미도 나가노 대회를 보며 꿈을 키웠다.

"제가 쇼트트랙을 막 시작했을 때가 1998 나가노 올림픽 때였어요. TV를 통해 경기를 보면서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쇼트트랙을 타면서 국가대표는 꼭 되고 싶었어요. 국가대표가 처음 됐을 때 기분이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요. 어린 나이에 그토록 원하던 꿈을 이룬 거니까요. 부모님도 좋아하셨죠. 지금까지도 실감이 잘 안 나요.“

국가대표가 된 그녀는 진선유, 최은경, 전다혜, 변천사와 함께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대표팀으로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는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첫 정식종목이 된 후 한국의 금메달 텃밭으로 자리 잡은 터였다.

토리노 대회 때 역시 우승후보는 한국이었다. 한국은 여자 계주에서 1994 릴레함메르 대회부터 2002 솔트레이크시티 대회까지 3연패 위업을 쌓았다. 당연히 4연패를 향한 전국민의 기대는 컸다. 자연스레 선수들이 짊어지는 부담감도 무거웠다.

"개인종목은 혼자만 잘하면 되지만, 단체종목은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해요. 때문에 계주는 쇼트트랙의 꽃이라고도 하죠. 메달 땄을 때의 기분도 개인종목보다 계주가 2, 3배는 더 좋아요. 우리 모두의 꿈이 올림픽 금메달이니까요. 하지만 긴장감은 엄청나죠. 제가 실수해서 팀 동료들에게 메달을 안겨주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계주를 할 때면 다른 때보다 더 정신 차리면서 하게 돼요.“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과는 한국의 우승. 한국은 쇼트트랙 여자 계주 4연패를 이루며 쇼트트랙 세계최강국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동시에 강윤미의 꿈도 현실이 됐다.

"TV를 통해 금메달을 딴 선수를 보면 감격에 겨워 우는 경우가 많잖아요. 하지만 전 마냥 좋아서 웃음만 나왔어요. 눈물 흘릴 새가 없었어요. '아 드디어 꿈을 이뤘구나'란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 선수에서 심판으로 변신한 강윤미 ⓒ 강윤미 제공
이후에도 선수생활을 지속한 강윤미는 2015년 2월 은퇴를 결정했다. "이정도 했으면 됐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강윤미는 "진짜 후회 없이 선수생활을 했어요. 그렇기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시 선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은퇴 후엔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은퇴 선수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영어 수업을 통해 공부를 했다.

영어는 쉽지 않았다. 일반인들에겐 당연했던 영어 문법도 강윤미에겐 낯설었다.

강윤미는 "대학교 때부터 미래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특히 20살 이후 처음으로 간 영어 학원에서 공부의 중요성을 깨달았죠. 당시에 전 주어동사도 구분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학원에선 '이거 아는 거니까 넘어갈게요'하더라고요. 제가 학교를 다니면서도 정말 배운 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죠"라고 밝혔다.

이후 강윤미는 미국으로 7개월 동안 유학을 갔다. 어릴 때부터 운동선수 생활을 해왔기에 규율과 통제에 익숙한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미국 유학은 생애 처음으로 맛보는 진정한 자유였다. 강윤미가 미국 유학을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꼽은 이유다.

"제 인생에서 미국 유학 갔을 때가 제일 좋았어요. 운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으니까요. 제겐 터닝 포인트였죠. 같이 영어 공부한 선수들과 7개월가량 미국 생활을 했어요. 다들 취업 고민이 많더라고요. 전 취업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주위 동료들을 보며 달라졌죠. 그렇게 해서 미국에서부터 취업준비를 하게 됐어요. 미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 서울시체육회에 들어갔어요. 서울시의 운동부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죠. 평소 제가 했던 일과 맞을 것 같아 지원하게 됐는데 결국 합격했어요.“

처음 겪는 회사생활. 20년 가까이 얼음만 탄 강윤미에게 회사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컴퓨터로 하는 기본적인 문서작성조차 그녀에겐 쉽지 않았다. 강윤미는 "가장 힘들었던 건 문서작성이었어요. 전 엑셀도 할 줄 몰랐거든요. 팀장이 엑셀로 무엇을 해오라고 시켰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결국 친구한테 부탁해서 겨우 일을 마칠 수 있었어요. 그 후 주말마다 친구에게 엑셀을 배웠죠“라고 적응하기 쉽지 않았던 회사생활을 털어놨다.

결국 강윤미는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서"가 주된 이유였다. 진로를 두고 방황하는 자신을 봤다. 그러다 문득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후배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하는 후배들에게 진로 계획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저는 은퇴 후 삶에 대해 알려주는 선배들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공공기관에서 하는 좋은 프로그램이나 자기소개서 쓰는 법, 취업 준비하는 법 등을 몰라서 힘들었어요. 대한체육회 홈페이지를 보다가 고등학교 선수들에게 진로강의를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다양한 경험을 했잖아요. 후배들에게 이를 알려주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지원했죠."

▲ 강윤미는 지금도 진로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 강윤미 제공
이렇게 강윤미는 진로강사라는 새로운 직업을 얻게 됐다. 강사 일을 안 할 땐 쇼트트랙 출발을 알리는 스타터 심판으로 일을 했다. 강윤미를 처음 만난 것도 '2019 교보생명컵 꿈나무체육대회'가 한창이던 아산 이순신빙상장이었다. 그녀는 심판으로 이 대회에 참가 중이었다.

"심판은 공정해야 돼요. 제일 어려운 부분이죠. 특히 저는 출발을 알리는 스타터예요. 눈으로 모든 걸 판단해야 해서 힘들죠. 아직은 배우는 입장이여서 심판 보는 게 쉽지 않아요."

강윤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 어린 선수들에게 할 얘기가 많다고 했다. 더불어 자신도 미래에 대한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뭐든지 노력이 항상 필요해요. 노력만 한다면 언제든 꿈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꿈을 되새기면서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세상에는 할일이 참 많아요. 운동선수들은 일반인들보다 집중력이 뛰어난 편이에요. 끈기도 있어요. 뭘 하든 운동할 때를 생각하고 그 마음가짐으로 한다면 못 꿀 꿈은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현재 강윤미의 꿈은 무엇일까? 강윤미는 "올림픽에 다시 또 한 번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제 꿈은 다시 올림픽에 나가는 거예요. 심판으로 말이죠. 올림픽 스타터 심판으로 이름을 날리는 게 제 꿈입니다.“

스포티비뉴스=맹봉주 기자 / 제작 한희재·이충훈 영상기자, 김예리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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