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버티고'의 배우 정재광. 제공|엘줄라이엔터테인먼트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 영화 '버티고'(감독 전계수)는 아찔한 고층빌딩에서 현기증을 느끼는 여자의 이야기다. 가족도, 연인도, 직장도 기댈 곳 없이 부유하던 여자 선영을 발견한 이는 뜻밖에 창 밖에서 유리를 닦던 로프공 관우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이 과묵하고도 외로운 사내는 그녀에게 뜻밖의 위로가 된다. 그를 연기한 이는 배우 정재광(29). 그 남자를 "삶의 의지가 담긴 천사"라 생각했다는 낯선 얼굴의 배우는 스크린을 나선 뒤에도 새삼 곱씹게 되는 '버티고'의 발견이다.

정재광이 연기한 관우는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제가 누구인지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다. 줄 하나에 매달려 있다 휘청거려도 무덤덤한 그는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선영이 눈에 들어온다. 관우는 얼굴에 피에로 분장을 한 채 높은 자리에 앉아 세상

을 내려다보기도 하는데, 우연인지 인연인지 계속해서 눈에 밟힌다.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며 우연히 뒤따라 술집 옆자리에도 앉아보지만, 때론 직접 글자를 적어 보내며 적극적으로 존재를 알린다.

관우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 정재광에게 전계수 감독이 전한 이야기는 딱 하나 "이 친구는 특전사를 나왔다"는 것이었다. 빈틈은 정재광 스스로 채워야 했다.

"이 친구가 말이 없어요. 모두 내려놓고 밑바닥에 있는 인물이 아닐까 했어요. 원래 시나리오에선 외줄타기도 하거든요. 제대로 땅을 밟고 있는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삶의 의지가 없고 무감각해서 살아있음을 느끼고자 그렇게 높은 곳에 있는게 아닐까. 관우는 서영을 통해서 단단한 땅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결국엔 살고자 하는 사람. 그랬기에 관객 입장에선 관우가 천사로 보여도 제 입장에선 서영이 천사같아서, 작은 관심에도 삶의 의지를 찾고자 했다고 생각했어요."

관우와 서영이 눈빛을 교환하는 등 보다 교감하는 장면들은 더 있었지만 영화에선 절제된 표현만이 주로 남았다. 정재광은 "감독님은 여백을 많이 두려 하신 것 같다. 캐릭터 또한 여백이 많았다"며 "텅 비워놓아라 하신 대로 현장에 가려 했다. 더이상 잃을 게 없어서 모든 걸 내려놓고 비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 영화 '버티고'의 정재광. 출처|스틸
'버티고'의 관우는 그 자체로도 정재광에게 특별한 존재이자 위로였다. 1990년생 정재광을 연기의 길로 이끈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본 영화 '타이타닉'. 이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며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15년 찍은 단편 '스카우팅 리포트'가 데뷔작이라지만, 사실 그전부터 찍은 단편이 40여편은 된다. 드라마 '구해줘', '열혈사제'에서 인상적인 조연을 맡았고, 주연은 이번 '버티고'가 처음이다.

"오디션을 본 작품에 모두 출연했다면 300편은 될 거예요. 그런 과정을 겪으면 의심할 수밖에 없어져요. 모든 일이 쉽지 않지만, 배우가 된다는 게 힘이 들었고, 내 길이 아닌가 의심도 들고. 내 옷이 아닌걸 우기며 입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쌓인 의심이 가끔 습관처럼 올라올 때도 있어요."

'버티고'는 그런 그에게 다가온 선물같은 작품이었다. 의심속에 작업해 온 단편이 힘이 됐다. 2016년 제42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그에게 독립스타상을 안긴 '수난이대'에서 그는 게시판 일간 베스트에 오르려 살부계를 만들어 동영상을 촬영하다 경찰에 넘겨진 고등학생을 연기했다. 그를 눈여겨 본 전계수 감독이 연락을 해왔다. 정재광은 오디션마다 전 감독이 연출한 '러브픽션' 속 구주월(하정우) 대사를 읊을 만큼 감독의 팬이었다.

"정말 힘들 때 이 작품이 왔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달 뒤가 미팅이었어요. 제겐 엄청나게 큰 전환점이자 위로였고요, 저 스스로는 어머니가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큰 영화, 큰 역할을 맡아서가 아니라 이런 시나리오, 전계수 감독님, (천)우희 누나… 하나하나 감사할 일이었어요. 그런 저였기에 관우의 위치, 처지에 더 공감했어요.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 다시 보낸다는 것… 관우의 뼈대가 일맥상통했던 게 아닐까. 다 내려놓는다는 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관우에겐 서영이 천사였다'고 표현한 서영 역 천우희와의 만남도 잊을 수 없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스치듯 보는 장면이 대부분이라 깊이 호흡하는 장면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바지, 관우가 서영을 대면하는 장면에서 그 정재광 역시 처음으로 천우희를 마주했다.

"레디 액션, 하고 딱 눈을 봤는데 배우라는 자의식이 사라지고 제가 관우가 된 것 같았어요. 풍덩 하고, 그냥 쑥 들어갔어요, 그 눈을 보면서…. 우와 장난 아니구나, 누나 장난 아니구나, 그 인물이구나 그랬죠. 관우가 서영에게 손을 내민다지만, 누나가 되려 저를 끌어주는 느낌이 있었어요. 외적으로는 저를 편하개 해주려 하셨고요. 저한테는 그냥 천사였어요."(웃음)

▲ 영화 '버티고'의 배우 정재광. 제공|엘줄라이엔터테인먼트

그는 현재 유하 감독의 영화 '파이프라인'을 막바지 촬영 중이다. 기름을 훔치는 '도유꾼' 이야기에서 경찰 역을 맡았다. 그 다음 행보도 정해져 있다. '윤리거리규칙' 이정곤 감독의 독립장편영화다. 그는 "감사하게도 일이 있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그저 정진하는 수밖에 없다"며 그저 "연기를 잘 해야죠"라고 웃어보였다.

"하정우 선배가 이런 말을 하셨어요. 알파치노가 시간따라 변하는 주름이나 신체적 변화까지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자신을 을 연기한다면 로버트 드 니로는 비워놓고 새로운 인물이 된다고. 두 가지를 잘 하고 싶어요. 제가 사라질 떄도 있고, 제가 보일 때도 있는 배우. 열심히 하겠습니다. 배우를 꿈꾸는 분들이 저를 보면서 용기를 내셨으면, 이변 엉화가 힘이 되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 roky@spotvnews.co.kr

▲ 영화 '버티고'의 배우 정재광. 제공|엘줄라이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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