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2020 시즌 ISU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2차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유영 ⓒ 유영 제공

[스포티비뉴스=조영준 기자]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에서 트리플 악셀은 어느덧 '성역'에서 '우승을 위한 필수 요소'로 바뀐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1978년 캐나다의 번 테일러가 그해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최초로 트리플 악셀에 성공했습니다. 김연아(29)의 전 지도자이자 현재 차준환(18, 휘문고) 하뉴 유즈루(일본) 등의 코치인 브라이언 오서(캐나다)는 올림픽(1984년 사라예보 동계 올림픽)에서 처음 이 기술에 성공한 선수였습니다.

여자 싱글 선수 가운데 트리플 악셀이라는 '금단의 벽'을 처음 넘은 이는 이토 미도리(일본)였지요. 이토는 1988년 NHK트로피에서 여자 싱글 역사상 최초로 트리플 악셀에 성공했습니다. 이듬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남자 선수 못지않은 엄청난 비거리의 트리플 악셀을 선보이며 보는 이들을 경악시켰죠.

이토가 처음 트리플 악셀의 벽을 넘은 지 어느덧 30년이 지났습니다. 이후 이 점프를 공식 대회에서 성공시킨 여자 싱글 선수는 11명이나 나왔습니다. 트리플 악셀을 11번째로 뛴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유영(15, 과천중)입니다.

▲ 여자 싱글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뛴 이토 미도리 ⓒ Gettyimages

유영은 3년 전부터 트리플 악셀은 물론 쿼드러플(4회전) 살코 등 고난도 점프를 연습했습니다. 2016년 12월에 열린 꿈나무대회에서는 한국 선수로는 처음 쿼드러플 살코를 시도했습니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여자 싱글 선수로는 처음으로 4회전 점프를 시도한 데 의의를 뒀습니다.

이후 유영이 트리플 악셀을 프로그램에 공식 배치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2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유영은 국내 최고 권위 대회인 전국남녀종합선수권대회에서 3번(2016, 2018, 2019)이나 우승했습니다. 명실공히 국내 챔피언 자리를 지켰지만 국제 대회에서 제 기량을 100% 보여주지 못했죠.

유영은 2017년부터 올해 초까지 주니어 무대에서 활약했습니다. 2년간 총 4번의 주니어 그랑프리 무대에 도전했지만 동메달 1개(2018년 주니어 그랑프리 슬로바키아 대회)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지난 3월 열린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6위에 그치며 메달권 진입에 실패했습니다.

올 시즌을 앞둔 유영은 만 15세가 되면서 시니어 무대에 데뷔할 조건을 갖췄습니다. 한국 여자 싱글 선수로는 역대 최연소(만 15살 5개월)로 시니어 무대에 데뷔했죠. 시니어 데뷔 첫해 유영은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시니어 그랑프리 1개 대회(2차 스케이트 캐나다)에 배정받았습니다.

▲ 유영 ⓒ 스포티비뉴스

이 대회를 앞둔 유영은 지난 8월 필라델피아 서머 인터내셔널에 출전해 우승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이탈리아에서 열린 ISU 챌린저 대회 롬바르디아 트로피에 출전했습니다. 이 대회 쇼트프로그램에서 유영은 트리플 악셀을 시도해 처음으로 회전 수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발로 착지하며 수행점수(GOE)가 1.12점 깎였습니다. 유영은 한국 여자 싱글 선수로는 처음으로 공중에서 3회전 반 회전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완벽한 성공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지요.

이어 출전한 챌린저 대회 US인터내셔널 클래식 프리스케이팅에서는 성공에 한 걸음 다가서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착지가 살짝 흔들렸고 0.8점의 수행점수를 잃었습니다. 이렇듯 트리플 악셀 성공이라는 퍼즐을 조금씩 맞추기 시작한 유영은 마침내 한국 여자 싱글 최초로 이 기술에 성공한 선수가 됩니다.

지난 26일 캐나다 캘로나에서 열린 2019~2020 시즌 ISU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2차 대회 스케이트 캐나다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 출전한 유영은 퀄리티 높은 트리플 악셀을 보여줬습니다. 도약부터 공중회전 그리고 착지까지 완벽했죠. 유영은 2.17점의 높은 수행점수를 얻으며 쇼트프로그램 2위를 차지했습니다.

국내는 물론 캐나다와 미국 그리고 일본에서도 유영을 '트리플 악셀에 성공한 11번째 여자 싱글 선수'로 소개했습니다. 27일 열린 프리스케이팅에서는 아쉽게 트리플 악셀에 실패했지만 남은 요소를 모두 깔끔하게 해내며 총점 217.49점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사상 7번째로 트리플 악셀을 뛴 키히라 리카, 유영과 키히라는 모두 하마다 미에 코치의 지도를 받고 있다.(유영의 메인 코치는 미국의 타미 갬빌) ⓒ Gettyimages

이번 스케이트 캐나다는 쟁쟁한 상위권 선수들이 총출동했습니다. 여자 싱글 역대 최고 기술을 보유한 알엑산드라 트루소바(러시아)와 지난해 시니어 그랑프리 우승자인 키히라 리카(일본) 여기에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러시아)와 최고 점수가 225.64점인 브래디 테넬(미국)이 한꺼번에 출전했습니다.

대회를 앞둔 상황에서 유영의 메달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며 받은 78.22점이라는 쇼트프로그램 점수가 판도를 뒤집었습니다. 프리스케이팅에서 트리플 악셀에 실패한 뒤 흔들리지 않은 정신력도 메달 획득에 힘을 보탰죠.

경기를 마친 유영은 "시니어 그랑프리 첫 대회라 많이 긴장했고 실수도 있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후회는 없다"며 소감을 밝혔습니다. 트리플 악셀에 성공한 점에 대해서는 "트리플 악셀을 더블 악셀처럼 뛸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해야 한다. 연습량의 50% 이상이 트리플 악셀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난도 기술이 피겨스케이팅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덧 기초 점수가 높은 기술은 승부의 분수령이 되는 시대가 왔습니다. 현시대와 10여 년 전 김연아가 활약했던 시대는 많이 변했습니다. 신채점제 도입 이후 고난도 기술에 자신 있는 선수들보다 '올라운드 플레이어'에게 유리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규정은 다시 바뀌었고 여자 싱글에서도 트리플 악셀은 물론 다양한 4회전 점프를 뛰는 선수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트리플 악셀은 승부수를 던지기 위한 무기가 됐습니다.

▲ 유영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성화 봉송자로도 참여했다. ⓒ Gettyimages

남자 선수들도 트리플 악셀이나 4회전 점프를 연마할 때 "몸이 많이 아프다"며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 기술이 쉽지 않다는 뜻이죠. 어린 나이에 트리플 악셀을 완성한 점은 유영의 앞날에 큰 플러스 효과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종목의 변수를 생각할 때 앞날은 쉽게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트루소바는 '꿈의 점프'인 쿼드러플 러츠를 비롯해 쿼드러플 토루프 + 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 등 3개의 4회전 점프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지난해 새로운 채점제가 도입된 이후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166.62)과 총점(241.05) 역대 최고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트루소바가 성장기를 거친 뒤에도 이렇게 4회전 점프를 잘 뛸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아사다 마오(일본) 역시 몸이 가볍던 주니어 시절에는 트리플 악셀 성공률이 높았지만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뒤에는 이 기술로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다행히 유영은 트리플 악셀 못지않게 비점프 요소도 중요한 점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앞으로 보완할 점에 대해 "스핀과 스케이팅 스킬도 부족한데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번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유영은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트리플 악셀에 대한 자신감은 물론 자신의 존재를 국제 심판은 물론 세계 무대에 확실하게 각인했습니다. 그는 '여자 싱글 역사상 11번째로 트리플 악셀을 뛴 선수'로 유영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선명하게 새겼습니다.

▲ 유영의 2017~2018, 2018~2019 시즌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인 '캐러비안의 해적' ⓒ Gettyimages

* 여자 싱글 역대 트리플 악셀 성공 선수(트리플 악셀에 성공한 최초 공식 대회)

1. 이토 미도리(일본) - 1988년 NHK트로피에서 여자 싱글 사상 최초로 성공

2. 토냐 하딩(미국) - 1991년 세계선수권대회

3. 루드밀라 넬리디나(러시아) - 2002년 스케이트 아메리카

4. 나가노 유카리(일본) - 2002년 스케이트 아메리카

5. 아사다 마오(일본) - 2004년 ISU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6.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러시아) - 2015년 세계선수권대회

7. 키히라 리카(일본) - 2016년 주니어 그랑프리 슬로베니아 대회

8. 미라이 나가수(미국) - 2017년 US 인터내셔널 클래식

9. 알리사 리우(미국) - 2019년 ISU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10. 알레나 코스토르나야(러시아) - 2019년 ISU 챌린저 핀란디아 트로피

11. 유영(한국) - 2019년 ISU 그랑프리 스케이트 캐나다

스포티비뉴스=조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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